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개 Jun 22. 2024

16. 여우가 내게 말했다.

2024. 3. 15 Fitz roy Trekking

  아침 6시 40분. 눈을 뜨고 날씨부터 체크한다. 비는 보슬비. 약간 춥고, 바람은 조금. 그래! 트레킹을 시도해 보자!

얼른 준비하고 7시 20분경 집을 나선다. 안녕 온이~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


숙소를 나서 등산로 입구로 향하는 길




  바짝 긴장을 하고 Fitz roy trail 입구에 당도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에 등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제 검색하다가 본 한 유투버는 길을 무슨 열 번을 잃었다길래, 혼자서, 그것도 인터넷도 안 터지는 산 중에서 길을 잃을까 봐 긴장 중이던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를 계속 체크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와중에도 기가맥힌 풍광


  시작부터 길이 쉽지는 않았다. 초반에는 긴장을 많이 해서, 경관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길을 잃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고서는 다시 본래대로의 페이스를 찾았다. 바람은 세지 않았고 간간이 비가 흩뿌리긴 했지만 시원한 정도였다.

비가 내린 후, 상쾌해진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며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과 협곡, 새하얀 구름과 설산을 만끽하며 걸었다.

정말 이보다 좋을 수 없을 듯한 기분이 이어졌다. 혼자 걷고 있는데 계속 웃음이 났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미소... 분명 나는 행복한 것일 터이다.






  원래대로라면 어제 오후에 오려했던 poincenot 캠핑장에 당도했다. 여기까지의 산행이 쉽지는 않았다. 텐트를 짊어지고 여기까지 비를 맞으며 왔다면 정말 심하게 지쳤을 거고, 얇은 텐트 속에서 추위에 떨며 바람을 견디며 잠들어야 했을 거다.

상상했던 캠핑은, 현실 속에서는 상상했던 대로의 낭만보다 극심한 불편함과 익숙지 않은 환경, 불친절한 날씨 속에서 빛이 퇴색되었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poincenot에서 조금 지나자, 악명 높은 가파른 돌길이 나왔고, 그 길을 새벽에 헤드랜턴에 의지해서 올랐다면, 정말 날씨가 온화하다 하더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길을 열 번 잃었다는 유투버도, 새벽에 오르다가 길이 안 보여서 그랬던 것 같다.


poincenot 캠프사이트 도착!
가파른 돌길.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는 많이 가팔랐음.



  사족보행을 하며 올라야 한다는 돌길은, 미리 겁먹었던 것보다는 할만했다. 한국에서 설악산 좀 올라본 사람은,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정도의 길이었다. 설악산 오색약수터를 자주 오르내리시는 어르신들은, 피츠로이 Los Tres 정도는 쉽게 오르실 거다. ㅡㅡ;;; 대한민국 산 만세!


  단, 어제 내린 비가, 산 꼭대기에서는 눈이 되었던 모양으로, 눈이 상당히 쌓여 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눈은 정말 예상조차 못했던 이벤트로, 아이젠은 물론 스틱도 없이 오른 나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여러 외국인들이 거의 기어오르고, 엉덩이로 내려오고, 여기저기에서 꺅꺅 거리는 비명이 들렸다. ㅋㅋㅋ

(나도 내려오다가 단 한 번의 실수로 엉덩방아를 심하게 찧어서 꼬리뼈가 금 갈 뻔했다. ㅡㅡ 뼈에 멍이 든 느낌이었는데, 이 통증은 남미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는 후문..)


눈길이 나타나기 시작... 여기저기서 꺅꺅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눈길을 헤치고, 드디어 Laguna de Los Tres에 도착했다.

"헉!!!"

  

과장이 아니다. 산 꼭대기에서 홀연히 나타난 호수를 눈으로 발견하자마자 숨이 멎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닌가? 사진으로 보아오던 풍광과는 전혀 달랐다.

안개에 삼봉은 가리어져 보이지 않았지만, 이 또한 연기를 내뿜는 산이라는 지역별칭에 걸맞은 상황인 것 같아 아쉬움보다는 아름다워 보였다.

(엘 찰텐이라는 말이, 원주민 언어로 '연기를 뿜어내는 산'이라고 한다.)


  게. 다. 가. 호수를 발견함과 동시에, 내 바로 앞에 야생여우가 풍성한 꼬리를 뽐내며 나타난 게 아닌가!

  이건 거의 현실감이 없었다. 동화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

  설산과, 멋진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평온한 에메랄드빛 호수. 그 앞에 여우. 

  나는 그냥 여우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아 한참을 추운 줄도 모르고 넋을 놓고 있었다.

여우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고, 그 어떤 사람도 쳐다보지 않고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 듯했으나, 편안해 보였다.






  나는 그 여우가 나를 위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과도한 의미부여와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 해도 상관없다.

만약 신이나, 그 비슷한 게 존재한다면, 내 앞에 야생여우로 나타난 것 같았다.

 '네가 이제껏 겪은 말도 안 되는 불운과, 네가 겪지 않아도 좋았을 많은 일들은, 다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이제 자유야. 넌 이 넓은 세상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고 있어. 너를 응원해.'

라고 말해주는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위안감, 행복감이 나를 감쌌고, 이상하게 포근했다.

심지어, 하산길 중, 하늘을 비상하는 콘도르를 만났는데, 내 앞에서 잠시 정지 비행을 하는 거였다. ㅎㅎㅎ

이 또한 미친 소리 같지만,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너야. 네 모습을 찾은 걸 축하한다.'

충만한 행복감이 등산 내내 나와 함께 했고, 더할 나위 없었다.




  어제 비가 내려 캠핑을 하지 않기로 했을 때는, 날씨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물론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이런 상황이 오히려 약간 재미있기도 했지만, 여행 준비 시기부터 등산 중에 텐트를 치고, 자연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자주 상상했었기 때문에 그게 현실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정말 인생은 알 수가 없다.

어제 나를 시무룩하게 했던 비가, 산 꼭대기에서 눈이 되어 내렸을 줄은... 그 눈 덕분에 아름다움이 백배가 된 설산의 Los tres를 볼 수 있었을지, 여우가 그때 그 앞에 나타날 예정이었는지는 정말 알 길이 없었다.


피츠로이 삼봉은 보이지 않지만 설경이 꿈같이 완벽히 아름다웠다


  산을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한층 더 충만한  미소와 함께였다. (산에서 내려와 숙소에 당도한 내 꼬질꼬질한 모습을 보며, 내가 별 말을 안 했는데도 온이가 "왜 이렇게 좋아해요?"라고 했다. 귀신인가...?)

  피츠로이 봉우리는 아쉽게도 안개에 가리어져 잘 보이질 않았기에 나를 포함 각국에서 몰려든 여러 트레커들은 하산 길에 자꾸 뒤돌아보며 안개가 조금이라도 걷혀   봉우리의 머리끝이라도 볼 수 있길 바라보았지만, 끝내 희미한 모습만 볼 수 있었다.

  아무렴 어떠랴, 나의 오늘 하루는, 완. 벽. 했다.


내려가는 길엔 등산객이 많이 몰리는 시간이었는지,  성수기 도봉산 보는 듯 했음. 전세계 산쟁이 다모임.
쪼금만 구름이 걷혔어도... 계속 뒤돌아보며 걷는 우리 산쟁이들.
거의 다 내려와서 보인 작은 마을 전경



+  내일은 무려 비행기를 타고 우수아이아로 떠난다. 남극과 가까이에 있다는, 땅 끝이라는 그곳.

다시 한번 충만히 부푼 마음을 안고 내일을 기다려본다.

이전 15화 15. 빗방울, 비비탄되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