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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나 Oct 11. 2024

책 무덤(아니, 공동묘지)

2024년 늦늦여름, 에어컨 바람 밑에서 책 읽고 싶은 날


우리 집엔 무덤이 하나 있다. 바로 책 무덤. 아니 사실 거짓말이다. 무덤이 한 개가 아니 여러 개니 이곳은 책들의 공동묘지다. 책들에게 영혼이 있다면 읽히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책꽂이 한 켠으로 밀려난 그들의 원망을 받았을 게 분명하다. 거실 한편에 쌓여있는 책들은  내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독차지하곤 한다. 책 무덤엔 하나의 마법이 존재한다. 집에 방문하는 사람마다 ‘한 마디’하게 만든다는 것. 보통 친구들의 조언은 성격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뉜다. 천성이 따뜻한 친구는 가볍게 전자책을 권하는 경우가 많다.

“언니, 전자책을 읽어보는 건 어때?”
“오! 좋은 생각. 근데 정말 놀랍게도 나 이북 리더기도 있고 전자책 서비스도 여러 개 구독하고 있어.”

자신만의 소비 철학을 가진 친구들은 보통 이렇게 조언한다.

“중고 서점에 좀 팔아. 그럼 돈 많이 받아.”
“이게 판 거야. 지금 책 판 돈으로 너랑 커피 마시는 거야.’

일본의 한 정리 전문가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고 했다. 놀랍게도 나는 모든 책을 만질 때마다 두근거리고 설렌다. 각종 서점에서 책을 시켜 놓고 도서관 대출 가능 도서만큼을 꽉꽉 채워서 빌려 놓은 후 전자책으로 독서하는 게 바로 나란 사람이니 말이다.


내 옆에 펼쳐진 (책)무덤뷰


이쯤 되면 다들 나의 책 고르는 기준을 궁금해한다.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은 간단하다. 첫 번째는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쓰윽 흝어본다. 두 번째는 책의 2/3 지점의 오른쪽 페이지를 빠르게 읽어본다. (나는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이런 행동을 했는데, 이동진 평론가도 이렇게 책을 고른다니 놀라웠다.) 책의 2/3 지점인 이유는 모든 책의 초반부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다이어리가 1월 달에만 빼곡하게 쓰여있는 것처럼 모든 작가의 원대한 꿈과 희망은 대게 첫 장에서 희망차게 시작해 후반부로 갈수록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래서 후반부까지 힘을 잃지 않고 쓰는 작가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어쨌든 내 책무덤에 있는 책들은 정말 깐깐한 기준을 통과했다고 자부한다.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활자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야 마는 한국 독자 계의 큰 별. 좋은 책을 보고 짖는 병이 있다면 나는 ‘개’인 것이다. 게다가 덕질을 못해서 죽은 귀신이 씐 나는 금세 내가 읽고 있는 작가의 덕후가 된다. 이렇게나 덕질의 자료가 넘쳐나는 시대에 나는 ‘자고로 돈을 써야 덕질’이라고 생각하는 제법 유교적인 덕후다. 이런 유교 덕후가 가장 기피해야 할 작가는 바로 다작을 한 작가나 전집을 쓴 작가다.


특히, 스티븐 킹 같이 골고루 많이 쓰는 작가를 덕질할 경우 출판계 관계자의 사랑을 받을 확률이 매우 높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바로 스티븐 킹 덕후니까. 그는 참으로도 많은 글을 쓰는 것도 모자라 영화화에도 적극적이고 SNS에도 적극적이고 심지어 글쓰는 법을 알려주는 글쓰기에도 적극적인 이른바 못 써서 죽은 귀신이 씐 사람이다. 신간 출간 인터뷰에 ‘이번 책을 많이 사랑해 달라. 이다음 시리즈를 절반 정도 집필했고 이번 연도 안에 퇴고할 예정이다.’라고 말하는 작가이니 말 다했다. 보통 한 권을 끝내고 다서 다음 책을 구상하지 않나? 같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작가지만 독자 입장에서 그는 참으로 덕질하기 좋은 존재다. 스티븐 킹은 기다리는 사람을 감질맛 나게 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모두 용량이 크던데 소설마저도 대용량을 선호하는 걸까. 


스티븐 킹의 작품들은 언제나 재미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들은 수도 없이 많다. 따뜻하고 재치 있는 글을 쓰는 김혼비 작가님. 소설부터 에세이까지 몽땅 다 내 취향인 박상영 작가님. 읽었던 소설도 매년 다시 펼쳐보게 되는 최은영 작가님. 소설계의 신성이자 나의 마음을 강타한 김화진 작가님… 이렇게 덕질하는 작가가 늘어가다 보니 책의 무덤마다 테마가 있고 헌정하고자 하는 작가가 있다. 테마와 헌정이 가득한 무덤이라니 이 얼마나 로맨틱한가. 


집에서 오매불망 나를 기다린 책들이 정말 경악할 일이지만 오늘도 퇴근하는 길에 우울해서 빵대신 책을 두 권 더 샀다. 책을 살 때 가장 행복한 나는 계속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자 서점가의 큰손으로 남고 싶다. 음식을 남기면 지옥에 가서 모두 섞어 먹어야 한다는데 안 읽은 책을 많이 쌓아두면 지옥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책 밖에 없지만 묘하게 신나보이는 사진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소식이 들려온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난 교보문고로 달려갈 것이다. 박상영 작가님이 추천한 한강 작가님의 소설들부터 사두고 읽을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가 추천한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는 묘미란. 집에는 책 무덤이 하나 더 늘겠지. 우리 집 공동묘지는 이미 만석이지만 이 책 무덤이 마지막은 아니리란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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