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편집자의 취향 확립 프로젝트
학창 시절, 나는 소위 덕후(오타쿠)였다.
친구들이 하나 둘씩 동방신기에 빠지던 때쯤,
정작 나는 멋지고 잘생긴 연예인이 아니라 필기구에 빠졌다.
지금은 사라진 성신여대의 한 팬시점 지하에서 펜 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살피고 테스트해보며 꾸깃꾸깃 모아 놓았던 용돈을 꺼내 들었을 때,
그렇게 내 인생 최초의 덕질이 시작되었다.
문구 덕후.
묘하게 앞뒤가 안어울리고, 아이돌 덕후와는 달리 꽤나 퍼석해보이는 이 단어 안에는 내 학창 시절이 꾹꾹 눌러 담겨있다.
친구들과 문구점에서 머리를 맡대고 모여 진지하게 필기구에 대해 논의하던 시간이,
마음에 쏙 드는 필기구를 하나 쥐어들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시간이,
소중한 친구에게 애정 어린 편지를 써내려가던 시간이,
속상한 마음을 일기장에 풀어내던 시간이,
필기구 하나에 온전하게 담겨졌다.
그렇게 필기구는 오랜 시간동안 나의 비밀을, 나의 어둠을, 나의 행복을 묵묵히 함께해주는 친구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필기구에 대한 취향은 계속 변하고 점점 뾰족해졌다.
그 시간동안 유행하는 필기구도 계속 바뀌어갔다.
침 꿀꺽 삼키며 한 자루 간신히 샀던 그 시절의 하이테크부터 시그노를 거쳐 쥬스업에 이르기까지.
선명하게 적히는 중성펜, 그 중에서도 가장 얇게 써지는 세필.
그게 나의 필기구 취향이었다.
문구점을 샅샅히 뒤져 그전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펜을 찾고, 그게 또 쏙 마음에 들면
그렇게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나는 그 사랑을 모으고 모아 필통 안에 한 가득 담아 놓고서 오늘은 어떤 사랑을 풀어낼지, 어떤 애정을 꺼내어 쓸지 고민했다. 쓰여지는 한 글자, 한 글자에도 내 마음이 똑 똑 떨어져 가 앉았다.
남들보다 공부를 오래 붙잡고 있었던 탓에 필기구는 내 손에 오래 쥐어졌다.
그만큼 가장 오랜 시간을 열정을 가지고 아낌없이 애정했던 존재.
그래서 내 문구 덕후의 삶 한 가운데에는 한 가지에 오랫동안 관심과 애정을 쏟았던 열정 어린 그때의 내가 있다.
오늘의 나는
양쪽으로 산 같이 쌓인 교정지 속에 앉아 회사에서 준 아무 빨간색 볼펜을 쥐고 있다.
내 취향이 담기지 못한, 그저 번지지 않고 끊기지 않아 일하기에 적당한 빨간색 볼펜.
필기구 취향은 바랜지 오래이고, 어느 덧 그 마음도 시들해졌다.
필기구야 잘 써지기만 하면 되는거지. 중성펜은 교정볼 때 번지기만 하는 걸.
세필 필기구는 교정본 부분이 잘 안 보이니까.
나의 취향을 내려놓고, 관심을 식히고, 열정을 가라앉힌 시간이었다.
괜찮다. 이만하면 되었다. 너도 할만큼 했다.
오랜 시간 가져왔던 꿈을,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했던 마음을 놓아주는 시간이었다.
스스로에게 오늘의 삶을 납득하라고 설득한 날들이었다.
아무 빨간색 볼펜을 쥐고 교정지 속 글자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손에 볼펜에 눈길이 간다.
오늘의 내가 놓친 건 어쩌면 일상 속에서 나를 이루던 자그마한 열정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