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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1.2.2. 바벨 시대의 공멸

소제목: 두 번째 바벨 반역과 공멸 방지 툴(Tool: 언어 혼잡)

by 에스겔


01.3.2.1.2.2.1. 첫 번째 공멸과 두 번째 공멸의 연속성


첫 번째 공멸은 아담과 그의 죄성을 그대로 받은 형상을 가진 인간들에 의해 일어났다. 그런데 노아 홍수는 그 죄의 본성을 없애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언제든 그런 공멸은 다시 일어날 것이었다.

첫 번째 반역의 시작은 우리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던 인간의 교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자신들 스스로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을 건설한 인류의 교만과 포악에 의해 심판은 세상에 벌금과 같이 과징되었다. 결국 인간들에 의해 세상은 멸망으로 치달렸다.

두 번째 공멸도 그렇게 일어날 것이었다. 이런 인간들을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부모라 인간들로 인해 노심초사하고 또 인간들에게 속한 세상의 생물들에게 닥칠 심판으로 인해 노심초사해야 한다. 어떻게 인간들을 막을 것인가? 오직 그 인간들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우리들 신뿐이다. 그러니 우리 부모가 나서서 스스로 인간들의 죄를 감당하고 죄를 자청하여 심판을 막아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공의의 법으로 우리 스스로를 묶어 인간들과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로 나섰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무지개가 표징이 되어 물로 인한 심판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을 언약했다. 그것은 언약의 형식을 취했지만 우리가 인간에게 한 맹세였다. 일반적인 언약과 맹세는 다르다. 일반적인 언약은 약속이다. 그 약속은 쌍방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그래서 한쪽에서 그 약속을 어기면 그 언약은 자동으로 파기된다. 그런데 맹세는 이와는 다르다. 약속은 약속인데 조건부가 아니다. 상대방이 약속을 어기더라도 반드시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들은 악마의 새끼가 되어서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괴물이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스스로 보증이 되어 인간들을 구해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맹세를 했다.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렇게 하면 인간들로 인해 초래될 물의 심판 즉 질서의 역전의 심판을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막게 되는 것이었다. 그 물의 심판은 인간들의 반역적 기질에 의해 언제든지 다시 초래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우리의 전능의 능력으로 그것을 막아내는 것이다.

공멸을 피해야 내 아이들이 땅에서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을 계속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나의 아이들이 처음 축복과 같이 번성하고 충만하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01.3.2.1.2.2.1.1. 두 번째 공멸의 테크놀로지



그러나 인간들의 공멸의 DNA는 다시 발현되었다.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교만을 동기로 해 그들 자신들의 이름이 하늘에 닿기를 원했다. 처음 인류(아담)의 조상 아담이 그러했듯이 언제나 하늘 높은 곳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노아의 하체를 보고 웃었던 함은 구스를 낳았다. 그리고 구스는 니므롯을 낳았다. 노아의 증손자, 니므롯은 용사였다. 여호와 앞에 힘센 사냥꾼이었다. 그는 도시를 만들고 그것을 확장시켜 왕국을 만들었다. 노아 방주 이전에 있었던 자신들의 조상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그 교만을 발동시키고 도둑놈의 근성을 발달시켜 자신은 높아져 나 여호와 앞까지 다다르려 했다. 그는 용사였다. 그 힘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는 이 세상 임금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세상을 그 탐욕으로 삼키려 했다. 그의 왕국은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했다. 탐욕을 확장시켜 아시리아로 가서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축했다. 레센은 큰 성읍이었다(창세기 10장). 도시들을 건설한 것이다. 인간의 타락과 공멸은 도시와 그 길을 함께 한다.


01.3.2.1.2.2.1.1.1. 도시: 공멸의 메커니즘


지금도 너희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너희 인류(아담) 자신의 욕심을 따라 탐욕을 향해 달려간다. 너희의 도시는 태초와 같이 사랑으로 서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상생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착취와 억압이 기본 메커니즘이 되어 정복과 정복을 덧붙여 공멸의 주검을 추구하는 구조다. 도시 문명은 공멸의 시스템이다. 도시 문명은 탐욕으로 인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여 주검에 주검을 덧대는 이데올로기다. 지금은 너희에게 이 말들이 조금 어렵게 들리겠지만 뒤에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위해 먼저 도시의 속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도시가 확장하여 나가는 형태를 관찰해 보자.



01.3.2.1.2.2.1.1.1.1. 메트로폴리탄(대도시권)


시골 마을과 도시는 차이가 난다. 시골마을과 도시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것은 인구수다. 인구의 과밀화가 도시의 특징이다. 시골을 벗어난 도시권에 들려면 사람들은 수많은 것을 포기하고 지독하고도 긴 씨름을 해야 한다. 그래도 대부분 도시로 도시로 행열을 이어간다. 도시와 도시가 뭉치면 메트로폴리탄 즉 대도시권이 된다.

도시에는 부요와 풍요, 그리고 안락함과 평안이 함께 할 것처럼 달콤한 유혹의 향이 함께 한다. 그 유혹의 향수에 이끌려 그리고 흥청망청하는 도시의 환락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취해서 비틀거리며 도시로 향한다. 함께 모여서 인간들 스스로 자신들의 욕구충족을 위해 발버둥 친다. 도시는 더 많은 기회와 더 많은 돈, 그리고 더 많은 안락한 삶을 허락할 것만 같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도시에서 그러한 삶을 이어간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삶을 착취하고 약탈한 대가다. 인간 개인이 시골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다. 함께 도시에 모이면 분업화와 상하 관계가 생긴다. 이 과정에서 약자, 무지한 자, 무자본가들은 항상 약탈과 착취의 대상이 된다.

누군가를 돕기 원하고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원한다면 그 사람은 도시가 아닌 오지로 그리고 도시에서도 가장 취약하고 궁벽한 가난의 현장으로 투입될 것이다. 그곳은 도시든 오지든 결코 도시의 요소가 없다. 그렇게 자신의 것을 나눠주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도시인이 아니다. 그들은 타인이 불쌍하여 타인의 고혈은 취하지 못하는 채식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도시인은 얻기 위해 권력과 돈과 안락이 될만한 것은 모두 찾아 빼앗는다. 그들의 착취는 그 끝이 없다. 땅의 끝까지 그 착취를 확장해 나간다. 그들은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포식자들이다. 그들이 얻는 방법은 약탈뿐이다. 그들은 도시의 노마드이며 유랑민이며 신 유목민이다. 약탈의 포도주에 취한 덜떨어진 망종들이다. 사이코패스이면서 자신은 선량한 소시민이라 생각하는 덜떨어진 육식공룡들이다. 그들은 남을 잡아먹으면서도 잡아먹는지 모른다. 자신의 집값이 오르면 그것이 누군가의 살점을 뜯어먹어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또한 자신도 그 집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제 그 탐욕의 물이 차올라 더 이상 전 생의 가치를 주고도 살 수 있는 집들이 없다. 집은 너무 비싸고 나의 노동의 가치는 너무나도 평가절하 된다. 갈 수 있는 곳이 없어진다. 마치 점점 물이 차올라 갈 곳을 잃은 것처럼 사람들은 집들을 잃어가고 있다. 오직 최상위 포식자의 배만 불려주는 이 착취의 탑의 정상을 향해 기어오를 뿐이다. 왜 오르는지는 모른다. 단지 그것이 좋을 것처럼 보이고 달콤한 유혹의 향이 강할 뿐이다. 그들은 가난한 직공 아이들이 말라죽어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전 생을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내어 던진 독일인 호구와트 출신의, 호구의 최종 종결자, 막스 아저씨의 말은 빨갱이의 말이라 내던져 버린다. 내가 예수라는 이름의 인간으로 행한 모든 내어줌은 구세군의 바구니에 담긴 백 원짜리 동전 하나도 안 되는 냥 발로 차 하수구에 빠뜨려버린다. 나도 호구와트 출신이고 나는 막스보다 더한 호구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희생은 구원의 가치도 없는 10원짜리 알루미늄 동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에게 나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반짝이는 볼 오너먼트를 사기에도 모자라는 구원일 뿐이다. 그래서 나에게 와서도 결국 자신의 탐욕의 오물을 더 부어달라고 그것이 축복이라고 축복을 요구한다. 차라리 돈을 내놓으라며 금색 손으로 원을 그려 동전을 구하는 신에게 비는 것이 빠를 터인데 왜 나에게 왔는지 알 수가 없는 자들이다. 그들에겐 금색 뱀의 손가락이 더 어울리는데 말이다. 그들이 도시에 건설한 교회는 과연 교회인 것일까? 바벨이라는 도시에 세워졌던 탑처럼 뾰족한 첨탑을 가진 그 건물은 과연 시온에 세워진 건물일까? 아니면 바벨에 세워진 탑일까? 호구의 신인 나에게 조차 약탈의 카니발을 바치는 저들은 로마의 후손, 옛뱀의 후예들일까? 아니면 가난한 아시시의 탁발 성도의 후손들일까? 도시는 그렇게 뱀의 탐욕을 먹고 자라고 성도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그렇게 자라서 탐욕이 더 뭉쳐지면 커져서 더 큰 도시가 된다. 그렇게 커진 거대도시를 메트로 폴리스라 부른다.

01.3.2.1.2.2.1.1.1.2. 메트로폴리스(거대도시)


도시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건설한 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가장 오래된 도시는 에덴인 것 같지만 에덴은 도시가 아니다. 그곳은 인구 과밀 지역도 아니고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할 방어수단이나 방어기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서로서로 다른 이들의 것을 탐하거나 착취하지 않는다. 빼앗고 도적질 하고 심지어 상대의 모든 것을 빼앗아 멸망시키는 것은 인간 타락의 결과물이다. 최초의 도시는 타락한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건설한 에녹성이다. 그 성을 출발로 해서 인간들은 고대의 문명을 꽃피워 온 세상을 덮는 문명을 건설했다. 도시가 확장이 되면 탐욕과 탐욕을 연결하여 뭉쳐진 탐욕의 괴물 거대도시 메트로폴리스가 된다. 이런 메트로폴리스가 둘이 모이면 초거대도시 메트로플렉스(메가폴리스)가 된다.


01.3.2.1.2.2.1.1.1.3. 메트로플렉스(메가폴리스, 초거대도시)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진 도시로는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옆의 다른 도시들을 지배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정복하여 두 개의 거대 도시들이 합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두 개의 거대도시가 합쳐진 도시를 초거대도시 메트로플렉스라고 한다. 이렇게 거대 도시들이 합해지고 다른 주변지역들을 지배하게 되면 그 지역을 점점 넓혀가게 된다.


아담으로부터 노아 그리고 바벨의 도시와 탑이 세워지던 세대까지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언어를 쓰는 동일 종족 그룹에 속했다. 그러니 니므롯과 같은 용사들이 세운 나라는 거대 제국이 되고 결국에는 전 세계를 통일하는 통일제국이 될 것이었다.


01.3.2.1.2.2.1.1.1.4. 에큐메노폴리스(지구도시, 또는 세계단일제국)


이렇게 전 세계가 하나의 도시 문명권으로 연결되게 되면 그것을 에큐메노폴리스라 한다. 이것은 도시의 개념이지만 사실 이것은 세계제국을 뜻하는 단어가 된다. 니므롯의 제국도 그 규모가 크지만 아직 정복한 땅은 작았다. 그 이유는 인류가 노아가족에게서 출발하여 번성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므롯 제국의 무서운 점은 그 제국이 세계제국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세계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언어를 쓰고 있었기에 힘만 있다면 어떤 장벽도 없이 세계를 질풍과 같이 휩쓸어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언어 그룹은 각자 자신의 지역을 통일하여 한 국가를 세우고 있다. 또한 그 세력을 확장하여 타 언어그룹까지도 정복하고 있다. 그런데 언어가 다른 것은 상당히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들을 제국의 정복과 통치에 떠안게 되는 것이다. 이 시절 니므롯의 제국은 세계정복에 걸림돌이 되는 최대 문제인 언어의 장벽이 없었으니 그 확장은 사실 인류의 수의 증가와 함께 급속화될 것이 분명했다.

그 이후 인류의 수가 늘었을 때 제국의 범위들은 훨씬 커져갔다. 심지어 인류가 거주하는 범위가 너무 넓어져서 한제국이 그곳을 모두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결국 하나의 통일된 제국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었다. 언어가 하나이니 그것은 더욱 쉬웠을 것이다.


01.3.2.1.2.2.1.1.1.5. 코스모폴리스(제국의 우주화)


그리고 인간은 나아가 지구를 벗어나 우주에까지 그 영역을 넓히려 하고 있다. 그렇게 우주화된 도시의 개념을 코스모폴리스라 한다. 이런 것을 상상하는 자들은 인간의 노동력이 아닌 자동화된 로봇과 그들이 채굴하는 무한대의 자원을 기대하며 우주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인간이 가진 노동력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연료와 자원을 사용하여 우주를 개발한다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공지능과 로봇을 사용하면 무한대의 노동력으로 무한히 뻗어있는 우주의 자원을 채취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지구의 비싼 자원으로 사업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달 기지나 화성으로의 진출을 꿈꾸는 국가나 기업들은 이런 것을 내다보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인공지능과 로봇기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도 바로 우주시대를 대비한 것이다. 인간의 탐욕은 멈출 줄 모른다. 그 탐욕은 지구를 거의 소진케 하고 있다. 이제 지구의 소진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도 인간들은 자신의 탐욕을 반성할 줄을 모른다. 자신들의 탐욕이 망쳐 놓은 환경이 자신들을 역습하고 지구의 멸망이 다가올 수도 있음에도 오히려 그 탐욕의 범위를 더욱 넓혀 무한대의 우주를 바라보고 있다. 그 탐욕은 무한대를 향해 뻗어가도 끝이 나질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심령은 무저갱의 늪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이 시점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의미를 상실한다. 이로 인해 벌어지는 끔찍한 일은 다음화에서 언급하겠다.




01.3.2.1.2.2.1.1.2. 탐욕의 도시: 공멸의 메커니즘


인간은 작은 탐욕의 시작, 도시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계속해서 확장하여 탐욕의 범위와 무게 그리고 힘을 더 크게 한다. 또한 주변 도시나 나라들의 인구를 계속 흡수하며 그 몸집을 키운다. 그렇게 커가면서 주변 지역과 나라들의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고 그 속의 악은 점점 짙어진다. 그리고 그들에게 착취를 당한 도시들과 주변은 인구부족으로 인해 버려진 땅이 된다. 더 이상 일할 일꾼들이 없다. 그 땅을 지키던 도시에 갈 수 없었던 도태된 노인들이 죽고 나면 그곳은 텅 비게 된다. 그러니 지역의 모든 인프라와 경제가 무너져 내린다. 이렇게 거대도시는 모든 것을 소진하며 자신의 몸집을 키운다. 노아의 시대에도 그러했고 바벨탑의 시대에도 그러하다. 심지어 세 번째 마지막 공멸을 앞두고 있는 너희도 동일하다.

인간의 탐욕은 도시를 이루고 그 도시로 인해 그 탐욕은 더 부채질된다. 그렇게 도시는 악에 악을 덧대고 죽음에 죽음을 덧대어 집에 집을 밭에 밭을 덧대어 자신의 제국을 확장하는 주검의 곳이 된다. 그래서 도시는 공멸의 메커니즘이 된다. 그곳은 죽음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 죄악의 도시에 심판이 부어진다. 그것은 막을 수 없다. 수많은 우리의 형상들이 뱀의 새끼들이 되어 악의 소굴을 만들고 우리를 거역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풍습이 가득 찬다. 그곳은 반역의 소굴로 악이 가득 찬다. 그러니 그들의 반역은 다시 바다의 반역을 부를 수밖에 없다. 첫 세상이 자신들의 반역으로 질서를 역행하므로 바다가 질서를 역행하여 반역자들의 땅을 집어삼킨 것처럼 또 동일한 일들이 내가 막지 많으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 반역과 반역으로 인한 물의 역전의 심판은 인류가 지상에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었다.


01.3.2.1.2.2.1.2. 위험한 첨단 테크놀로지와 짧아지는 공멸의 주기

01.3.2.1.2.2.1.2.1. 1656년과 200여 년

노아시대의 공멸 위기 이후 인류의 공멸의 위기는 너무도 짧은 기간에 닥쳐왔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벨렉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창 10:25) 바로 시날 평지의 도시 바벨에서의 반역으로 인류 언어가 혼잡케 되었고 인간들은 수천의 작은 언어단위의 종족으로 나뉘어 흩어져 살게 되었다. 벨렉은 홍수 후 101년에 출생하여 340년에 죽었다. 벨렉의 시대에 도시 바벨에 탑이 세워졌다. 그러니 성경을 기준으로 하면 홍수 후 약 100~340년 만에 인간은 다시 공멸을 불러들였다. 벨렉의 나이의 중간 시간대로 계산하면 220년이다. 약 200년 만에 일류는 다시 심판에 다다랐다. 또다시 우리의 앞에 인류의 마지막이 닥쳐왔다. 이 시간을 보라. 너희는 이 시간이 얼마나 짧아졌는지 알겠는가? 처음 공멸이 땅에 닥쳐오기까지의 년수는 아담 창조 후 즉 세상의 완성 후 1656년이었다. 너희들에게 준 성경을 근거로 말하면 아담이 처음 타락한 년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가인 출생 이전이다. 아담은 가인을 130세에 낳았다. 그러니 1656년에서 130년을 빼더라도 인류 타락 후 첫 공멸의 심판이 오기까지 1526년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보이는가? 처음 세상의 공멸에서 구원받은 자들인 노아의 자손들은 길어야 300년 만에 심판을 자초했다. 스스로 공멸의 길에 들어가는 시간이 이렇게 짧아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노아와 그의 후손들이 아담의 후손들보다 더 악해진 것일까? 인간의 본성은 동일하게 악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악함의 색은 평균적으로 더 진해진다. 인간이 나이가 들면 어릴 때보다 훨씬 악해진다. 그리고 인간의 문명도 그 발생 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악해진다. 그리고 결국 그 자체 문명의 악함에 의해 공멸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이상하다. 최소한 노아와 그 조상들의 신앙을 보면 노아의 자손들이 홍수 이전의 인류에 비해 더 악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개인도 문명도 처음의 출발은 거의 동일선상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하다. 그러나 그 악함이 평균적으로 거의 동일선상에서 출발한다. 예외적으로 싸이코패스와 같은 자들이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특이 케이스일 뿐이다. 물론 그 개인이 소속된 문명이 발생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 공멸에 가까웠다면 그 사회의 악에 물들어 개인의 악이 훨씬 더 짙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문명의 출발과 개인의 출발은 그 악함의 색이 거의 비슷하다. 그러므로 그 문명의 공멸도 평균적으로 거의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빠른 공멸이 찾아온 것인가?

바로 악함의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공멸을 재촉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 문명이 가지고 발달시킨 테크놀로지의 근원은 악함에서 출발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키고 우리를 신뢰하지 않고 우리를 비웃는 저 에녹성을 보는가? 도시는 인간 문명의 최고의 테크놀로지다. 인간들이 오랜 세월을 살며 기술을 진보시키고 그 기술을 다시 천년가까이 사는 인간에게 전달하지만 그 기술 자체가 문명의 공멸을 재촉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 기술로 인해 발전의 속도가 빨라지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의 교만이 더 짙어진다. 그것이 내가 너희에게 테크놀로지가 문명의 악함의 집합체이며 그것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문명의 발달과 악독화는 함께 가속된다고 말하는 이유다.



01.3.2.1.2.2.1.2.2. 도시: 공멸의 메커니즘


위에서 도시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도시와 도시 안에 있는 테크놀로지 그리고 문명의 메커니즘이 공멸을 자초하는 악함의 화초를 기르는 거름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진보한 기술과 탁월한 능력을 가진 문명일수록 빨리 타락하고 빨리 공멸에 이른다. 저 칭기즈칸의 제국이 그러했고 알렉산더의 제국이 그러했다. 그런 문명은 순식간에 팽창하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이유는 그들의 문명 메커니즘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탁월하게 악한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다른 도시들을 집어삼키고 다른 문명들을 집어삼킬 수 있는지에 대한 테크놀로지가 탁월했다. 그들의 전쟁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만약 그들의 전쟁 테크놀로지가 조금 열등했더라면 그들의 공멸은 그렇게 급속히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테크놀로지는 결국 인간의 악함을 인해 착취와 억압을 위해 쓰여진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좋은 기술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으로 방직기를 만들었다. 그 결과 수많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게 되었다. 결국 가내수공업으로 직조를 하던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인간은 기술로 다른 이의 행복을 돈을 착취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 부를 쌓아간다는 것은 누군가 그 부를 빼앗겼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아담) 문명의 지식과 학문 테크놀로지는 모두 한 곳 발전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발전이란 것의 속성을 관찰해 보면 남의 것을 착취하지 않고는 자랄 수 없는 먹이사슬을 가지고 있다. 도시문명은 필연적으로 그 악한 근원적 속성에 의해 공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처음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에 두 번째 공멸에 이르게 된 것은 바로 공멸의 메커니즘, 즉 도시화의 기술과 문명화의 기술이 더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빨리 공멸에 도달하지 않을까? 맞다. 그렇다. 그러나 특수한 환경에서 때로는 기술이나 문명의 진보가 퇴보하여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다. 그럴 때는 공멸로 내달리는 속도가 줄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전 세계가 거의 한 문명권인 너희의 시대에는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 없다.

바벨의 도시와 탑이 건설되던 시기도 동일했다. 1000년 가까이 살았던 인류의 수명 덕에 인류 문명의 메커니즘도 극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도시 문명의 메커니즘은 테크놀로지라는 명목하에 노아의 자손들 안에도 잔존했고 그것이 그들의 공멸을 더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너희 인류(아담)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도시화되고 문명화되고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극도로 발달된 세상이 유토피아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너희들이 잘 알지 못해서 하는 잘못 중얼거리는 잠꼬대에 불과하다. 첨단 문명의 메커니즘은 단지 공멸의 시계를 급속히 움직이는 강력한 연료일 뿐이다.


01.3.2.1.2.2.2. 니므롯 제국의 도시문명 바벨과 그곳에 세워진 탑



너희는 아는가? 성경에는 바벨탑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너희가 가진 성경어플을 검색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바벨은 니므롯이 세운 도시(city, polis) 중 하나였다(창 10:10) 그리고 사람들은 동쪽에서 이주하다가 시날에서 평지를 만나 거주하였으며 그곳에 도시와 탑을 세웠다고 나온다(창 11:2~) 그리고 그 도시의 이름이 바벨이라고 나온다. 창세기 10장과 11장의 기록을 보고 너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있다. 10장은 큰 역사의 흐름에서 니므롯의 제국이 그 도시를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11장은 구체적으로 그 도시가 어떻게 지어졌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너희는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는 바벨탑이라는 명칭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된 것인지 바벨에 세운 도시에 대해서는 성경에 없는 것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바벨이라는 도시문명과 그 문명이 추구한 것을 파악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공멸의 메커니즘 도시문명의 참 실체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너희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공멸을 자초한 인류를 보고도 그들의 오류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바로 역사의 가장 주요한 기능인 역사적 교훈을 잃어버리고 또다시 그들의 실수를 되풀이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 정말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이 본문들을 보았더라면 너희 인류는 공멸의 메커니즘인 도시 문명을 다시는 건설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은 짐승과 같이 또 같은 일을 되풀이하며 공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너희가 성경을 읽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너희 사악한 마음이 그것을 깨닫기 싫어함이다. 그러니 오늘도 너희는 짐승의 길로 달려가며 짐승과 같이 탐욕의 먹이를 쫓아 도시 문명에 길들여졌구나.



01.3.2.1.2.2.2.1. 도시 문명


바벨에 있던 것은 도시 문명이었다. 위에 장황하게 도시에 대해 설명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바벨은 도시의 이름이며 지명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키고 자신들의 탐욕을 충족시킬 자신들의 메커니즘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도시문명이었다. 니므롯 제국의 시작은 바벨이었다. 그는 시날평지의 바벨에서 사람들에게 공약을 내걸었다. 너희에게 첨단 테크놀로지로 지어진 멋진 도시를 선물하겠다고 했다. 그는 테크놀로지로 다시 에덴에서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고 했다.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은 부를 누릴 수 있고 그 부로 인해 행복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의료와 도시 문명 테크놀로지의 극한 발달로 에덴에서 처럼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땀을 흘리는 수고가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했다. 바로 테크놀로지의 고도화로 모든 노동을 테크놀로지가 대체하는 세상이 온다고 했다. 혹자는 그런 세상을 테크놀로지 유토피아라 했다. 그런 세상이 오면 더 이상은 신에게 행복을 구걸하는 종속적 굴욕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01.3.2.1.2.2.2.2. 심판 대항 탑


또 만약 그런 자신들의 행복을 짓밟기 위해 신이 다시 물로 심판하려 해도 자신들은 테크놀로지로 대항할 것이라고 했다. 그 테크놀로지가 바로 탑이었다. 탑을 하늘에 닿도록 쌓아 신에게까지 올라가자는 것이었다. 신이 물로 심판을 해도 신 자신이 있는 곳 하늘까지는 물로 채울 수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을 호도했다.

모세 시대의 표현으로는 탑의 재료가 벽돌과 역청이었지만 사실 벽돌과 역청으로 하늘에 닿는 탑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래 재료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돌과 흙이었다. 돌을 대신하여 벽돌을 굽고 흙을 대신하여 역청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돌과 흙으로 쌓은 자연의 집들과 건축물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으로 쌓을 수 있는 탑은 과연 몇 층이나 될까? 그리고 그것으로 홍수의 거대한 물결을 견딜 힘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혹시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이 거대한 돌을 사용해서 건축물을 짓는다면 그런 재료로도 홍수를 견딜 튼튼한 탑을 쌓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런 재료를 시멘트 대신 사용하여지을 수 있는 집의 높이가 하늘에 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 너희들이 사는 현대의 고층빌딩 수준의 건물조차 만들 수 없다. 또한 너희 현대인들도 겨우 고층빌딩을 짓는 것이 너희 건축술의 한계임을 알고 있다. 조금씩 그 높이를 높여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늘에 닿을 마천루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나 역청은 그 자체로는 흙을 대체할 재료가 될 수 없다. 흙은 물에 개어 돌 사이에 넣으면 구조재와 접착제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 그런데 그것을 역청으로 대체한다면 역청은 돌사이에서 흘러내려 땅으로 떨어져 흡수되어 버릴 것이다. 바벨에 탑을 쌓던 자들이 그렇게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는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른 추론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추론이 그 시대의 사람들이 미개해서 그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었다고 보는 것은 단지 너희 현대인들의 교만일 뿐이다. 홍수와 바벨탑의 언어 혼잡으로 그 힘을 잃은 이후에 남아있는 고대의 건축기술이 상당했음을 우리는 유적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타인을 미개인 취급하는 교만한 억측은 그만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현대에도 지을 수 없는 하늘에 닿는 탑의 건축을 추진할 수 있었을까?

벽돌과 역청으로 바벨에 도시를 건설하던 시대에는 홍수 이전의 기술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홍수 이전의 문명은 그 발달이 극한에 이르렀었다. 그래서 그 교만과 악도 극한에 이르렀고 그 테크놀로지를 소유한 자들의 착취도 그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인해 더 극대화되었다. 기술이 좋은 자의 손에 들어가면 유익이 되지만 악한 자의 손에 들어가면 살상무기가 되고 죄 없는 다른 나라들을 집어삼키는 정복의 수단이 된다. 또한 그 기술력으로 인해 교만은 끝도 없이 올라가 온 세상을 내려다보며 교만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런 홍수 이전의 테크놀로지로 세라믹 재료나 땅의 광물들을 녹여낸 금속과 각종 첨단 소재들을 의미하는 것이 벽돌이다. 또한 역청은 석유로 만든 각종 화학물질을 말한다. 석유로 만든 접착제로부터 방수액, 그리고 석유로 가공할 수 있는 플라스틱류들을 모세시대에는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석유를 원료로 가공하여 만들어낸 것들을 우리가 모세에게 보여 주었을 때 모세에게 그 모든 것은 재료가 되는 역청으로만 설명될 뿐이었다. 설혹 모세가 이것들을 이해했을지라도 모세의 관심은 우리의 뜻에만 있었기에 재료가 되는 벽돌이나 천연 용천 석유인 역청만 성경에 언급했을 것이다. 성경의 관심은 그 시대의 테크놀로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 탑의 재료나 테크놀로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공멸을 가속시킬 부조수단에 불과하다. 진정한 공멸의 메커니즘은 인간이 교만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세우는 성(도시)과 스스로 홍수 심판을 이겨내려는 탑의 도시문명 시스템에 있다. 인간 심리의 가장 기저에 있는 핵심감정은 반역이다. 인간은 자존심이 그 기저에서 교만을 불러와 인생의 대부분의 동기를 형성한다. 소위 자기를 세우려는 욕구다. 그것을 자아실현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은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신인 우리에게 대항하는 어리석은 날파리들일뿐이다. 지렁이가 어떻게 인간의 뜻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런데 너희와 나의 격차가 과연 지렁이와 인간의 격자이겠는가?

니므롯은 공멸의 메커니즘인 교만의 도시 문명과 지식나무인 테크놀로지의 탑을 바벨에 건축하려 했다. 그런데 니므롯은 과연 도시와 탑을 바벨에만 건축했겠는가?

물론 도시는 여러 지역에 건축했다고 나온다. 그 도시들은 시날 평지의 바벨, 에렉, 악갓, 갈레, 아시리아 땅의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 레센이었다. 니므롯이 건설한 바벨의 도시 그리고 탑은 정확하게 홍수 심판을 대비한 것이었다. 홍수 심판을 대비해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에 수많은 인구를 모았다. 그리고 그 인력과 자원을 이용하여 거대한 탑을 건설했다. 그렇다면 바벨 외에 다른 지역에 있는 자들은 홍수가 왔을 때 모두 죽어야 하는가? 그래서 니므롯은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에도 탑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현대의 너희가 고고학자들을 통해 고대근동지역에서 유사한 탑의 흔적들을 여러 지역에서 발견하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니므롯은 사람들에게 각 지역들의 중심 도시를 건설하고 홍수를 이길 탑을 만들라고 했다. 그의 거짓공약은 사람들의 표를 얻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지역 지역마다 니므롯의 추종자들은 늘어갔다. 또한 그들은 니므롯의 강압적인 지배와 착취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니므롯은 홍수 심판으로부터 그들을 구해줄 구원자로 숭배되었다. 심지어 그를 우리를 대적할 또 다른 신으로까지 받들었다. 이렇게 되니 니므롯의 지배하에 있지 않던 사람들도 스스로 자원하여 니므롯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도시는 일상의 생산과 쉼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존재 목적은 탑의 건설이었다. 도시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자원은 탑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지금 조금 힘들어도 탑이 건설되면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된다는 사실에 새 힘을 내어살았다. 탑의 건설에는 모든 지식과 모든 자원이 집약되었다.



01.3.2.1.2.2.2.3. 지식 탑



탑의 건설은 고난도의 기술을 요했다. 현대에도 고층빌딩을 짓는 것은 최고의 건축기술이 요구된다. 특히나 세계 최고층의 빌딩을 건설하는 것은 최첨단 건축공학과 세계최고 수준 건설사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 고층빌딩을 건설하는 건설사는 자연히 그 기술력과 자본동원력 및 모든 건설제반 능력을 인증받게 된다. 그런데 바벨과 니므롯의 도시들에 건설되던 탑은 지금의 마천루들의 높이로도 만족할 수 없는 초월적 높이를 목표로 했다. 그러니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공학적 지식이 동원되었다.


니므롯은 그 끝이 없는 탑의 건설을 이용했다. 니므롯은 탑의 건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업임을 알았다. 그 영원한 시간 동안 니므롯은 사람들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었다. 탑으로 인해 니므롯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그 시대의 기술로 올라갈 수 있는 한계는 우리가 있는 하늘이 아니었다. 지금도 인간은 우리에게 닿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당시 바벨에 세워진 탑은 단지 좀 높을 뿐이었다. 그 이상의 높이로 탑을 쌓으려면 그 기초부터 보강하여 그 기단부의 넓이를 배가 되게 확장해야 했다. 나중에는 탑의 기단부의 넓이가 도시의 건물들의 터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또한 기초를 보강하기 위해 골조의 뿌리를 더 깊은 지하로 내려야 했다. 그렇게 해서 탑은 홍수가 더 이상 넘어올 수 없는 높이까지 도달할 것이었다. 그곳은 우리가 있는 하늘은 아니지만 지상의 푸른 평지 위에 우뚝 솟아 홍수가 최고조에 올랐던 높이보다는 훨씬 높아질 것이었다. 건설 중간중간에 수많은 기술의 한계와 자원의 한계에 부딪혔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인류는 그것들을 극복해 내고 탑의 높이를 올려갔다. 인간들의 교만은 극에 달했다. 자신들이 발견한 지식들도 결코 물에 잠기지 않으리라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발견한 지식들을 탑의 높은 곳에 저장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세상의 모든 테크놀로지와 철학, 문학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인류는 또 각자의 부를 탑에 저장하기 시작했다. 아직 탑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리고 도시에 따라 그 진척이 달랐지만 좀 더 높은 곳이 건설되면 그곳으로 세상의 지식과 자원들이 옮겨졌다.

인류는 탑과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숭배했다. 그 지식들을 동원해 쌓아 올린 탑을 보며 자신들 마음의 포만감이 높아졌다. 그리고 자신들의 미래를 대비할 자원을 최대한 탑의 상층부로 올리기 시작했다. 탑은 그 자체로 지식의 나무가 되었다. 또한 인류의 최강의 자원들의 집적소가 되었다. 드디어 인류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했다던 신이라는 존재(우리)를 비웃기 시작했다.



01.3.2.1.2.2.2.4. 심판의 탑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심판을 부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리고 자신들의 교만이 심판을 불렀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알고 있었으나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우리는 심판을 행하기 원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심판을 재촉하여 불러들여 땅 위에 가득하게 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다시 심판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심판의 호랑이를 묶고 있는 쇠사슬의 열쇠를 풀어 호랑이를 풀고 있었다. 그러면서 신인 우리에게 왜 호랑이를 푸는 자신들을 막지 않았냐고 원망한다. 그리고 풀려지는 호랑이를 다시 묶지 않았다고 하소연 섞인 푸념을 한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호랑이를 풀었다는 사실은 잊은듯하다. 인류는 다시 하나가 되어 교만의 반역을 꿈꾸었다. 그 반역으로 인해 다시 물이 인간의 땅을 역습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바벨에 세워진 탑은 심판의 탑이 되었다.




01.3.2.1.2.2.3. 인류 공멸 방지 툴: 언어 혼잡



이제 또다시 인류는 공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홍수로 심판받는 일이 없도록 심판 대항 탑을 쌓았다. 인류는 자신들이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하며 탑의 높이를 올려갔다. 그들이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라는 표현한 것은 우리가 자신들을 앞으로 언어 혼잡으로 흩을 것을 예견한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홍수 심판을 당하여 자신들이 시체로 널브러지는 것을 면하자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교만을, 언어종족별로 나누어 세계에 그들을 흩음으로 갚았다. 그들의 말 그대로 갚았다. 그들을 세상에 흩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말에 대한 복수나, 심판이나, 형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를 공멸로부터 구원할 최고의 공멸 방지 툴이었다.

노아시대와 바벨의 도시와 탑이 세워지던 시절에는 세계가 오직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한 언어로 소통이 가능했다. 니므롯과 같은 용사들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한 언어를 사용하여 명령을 내리고 착취를 단행케 했다. 땅은 단 한나의 언어와 단 하나의 권력으로 단일화되기 시작했다. 땅의 모든 힘은 단 하나로 공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것이 바벨의 도시와 탑이 건설되기 시작한 때의 역사의 단면이었다. 그런데 그 단면에서 시각을 확장하여 다층적인 분석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입체적 역사가 보인다. 우리는 인간이 공멸의 DNA를 가졌으며 그것을 결코 인간이 죽기 전에는 제거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 공멸의 단위를 수천 수억 개로 나누었다. 즉 언어를 혼잡케 했다. 그리고 그 언어에 따라 수많은 종족을 나누었다. 바로 그 단어가 바벨이라는 단어의 뜻이다. 그 수많은 언어 그룹이 지구촌에 섞여졌다. 바로 바벨 된 것이다. 그렇게 되니 단일한 언어 체계와 단일한 권력 체계로 단번에 공멸에 이를 인류가 수많은 다른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공멸하더라도 수천 개의 언어그룹 중 그 언어를 사용하는 그 그룹만 멸망하는 것이다. 또 언어그룹들 중 멸망하는 것이 있으면 그 사이 남아있던 언어그룹들이 분화하여 새로운 언어그룹을 더 생산하여 멸망하는 그룹을 대체하게 되었다. 언어의 역사들을 공부해 보면 언어는 그 언어가 하나의 단위를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어는 고대, 중세, 현대의 한국어가 있다. 그런데 고대에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같은 언어였다. 그것이 중세를 거쳐 현대가 되면서 분화하고 변천하여 전혀 다른 언어가 된 것이다. 고대에 한 언어에서 두 개의 언어그룹이 형성된다. 이는 다른 유럽 언어들의 변천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언어그룹이 끊임없이 생성됨으로 인류는 모든 언어그룹의 멸망이라는 절재절명의 위기는 극복할 수 있었다. 또한 이제는 심판이 전 세계를 덮는 물로 오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의 공멸의 DNA를 알고 인류(아담)의 행위와 상관없이 스스로 구원자가 되며 스스로 구원의 길을 열었다.

사실 이는 허무하고도 황당한 끝일 수 있다. 이렇게 언어가 혼잡되고 그 언어그룹들이 수 천 개로 분화하여 각자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무슨 해결책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것이 최선책인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인간은 개인이든, 수천 그룹이든, 오직 한 그룹이든, 언제나 결국은 멸망을 향해 내달리는 공멸의 DNA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최대한 늦추고 또 그 늦추어진 공멸의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영혼들을 건져내어야 하는 것이다.

간편한 것은 인류를 모두 죽이고 완전히 새로 창조하면 된다. 그런데 인류는 우리의 아이들이다. 우리가 아이를 어찌 죽이겠는가? 내가 나의 아이가 죽음으로 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우리는 모든 수단,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우리 아이들을 살려낼 것이다. 그것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던 아니던 그 아이들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내린 판단이 아니라,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아이들을 반드시 건져낼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라도 걸고 내어줄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내던져서라도 아이들을 반드시 구해낼 것이다.
"눈 멀고, 귀 먼,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야 이제라도 눈을 뜨고 듣고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자."

나는 나의 신부 된 나의 도시와 성들에 말한다.
"나의 신부야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살길을 찾자. 이제 나에게 다시 돌아와 그 입을 열어 사랑을 노래하자. 다시 사랑의 몰약을 마시며 그 몰약의 달콤함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자. 에덴이라는 곳은 참으로 향기롭고 아름다우니 그 풍성함을 다시 너에게 혼인 선물로 주노라. 나의 신부야 나와 함께 다시 신혼집으로, 다시 에덴으로 달려가자. 거기서 나는 나의 모든 것으로 너를 사랑하마. 내 모든 것은 너의 것이니 마음껏 나의 것을 가지고 영생의 즐거움을 누리렴. 나의 신부야 너의 작은 입술과 가냘픈 손은 나의 보호를 이끌어내는구나. 사랑한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야. 나는 너의 모든 더러움을 씯기고 나의 피로 씻은 붉으나 무죄한 자의 피로 가장 고귀한 백색인 린넨 드레스를 입히리라. 순백의 장미화로 나의 사랑, 너의 머리와 몸을 백장미 향으로 가득케 하리라. 가장 아름다운 나의 순백의 여인, 나의 사랑, 나의 신부야 나의 손을 잡자. 내 손에는 영생의 몰약이 내 입술에는 거룩한 지혜로 가득 찬 사랑의 꿀이 흐른다. 이제 나를 사랑하여 영원히 처음처럼 나에게 안겨 세상이 알 수 없는 우리만의 밀월의 향기와 박하향의 시원함으로 마음을 채우자. 사랑한다. 나의 신부,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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