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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1.2.1. 노아 시대의 공멸

첫 번째 반역과 공멸 방지 툴(Tool): 노아 언약

by 에스겔

01.3.2.1.2.1.1. 첫 번째 반역과 공멸


노아 시대의 일을 첫 번째 반역이라 함은 노아 시대의 타락은 바로 첫 아담의 반역이 낳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노아가 태어난 시기는 아담이 죽은 지 126년 되는 해였다. 그리고 아담의 아들 셋이 죽은 지 12년 되었으며 셋의 아들로 창세기 4장에 언급된 유명한 에노스는 노아가 84세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다. 노아는 아담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사람이다. 노아의 출생은 아담 창조 후 1056년이었고 노아의 홍수는 아담 창조 후 1656년 되는 해였다. 노아가 600세 되는 해였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천년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사실 노아의 홍수는 아담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 세대의 타락은 노아의 아들 가인의 혈통들에서 나온 타락이다. 그들의 타락은 잔인했으며 너무도 속히 부패하는 인간 본성의 악마적 근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타락과 타락이 난무하는 무법자들의 종말의 행렬이 이 시대였다. 모든 자들이 타락하여 악마적 근성으로 다른 이들을 약탈하면 다른 이들의 모든 것을 착취하는 세대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그 이름은 가장 이기적인 착취를 동반한다. 그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인간들이 구하는 것은 상대의 행복과 상대의 만족이 아닌 자기만족이다. 상대의 육체를 통해 자신의 만족을 추구한다. 상대의 아름다움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상대의 따스함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 한다. 인간은 사랑하면서도 그 도둑놈의 근성, 이기적 악마의 본성을 놓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보지 못하는 악마적 근성으로 자신의 악함은 가리고 모두 선한 것으로 포장하려는 어리석음에 취해 산다. 세상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오직 더 강렬한 욕구의 해소요, 더 악랄한 착취다.

그런데 이것이 노아의 시대만의 특징이겠는가? 너희의 시대는 다른가? 역사의 어느 시대는 이때와는 달랐는가? 인간이 타락한 모든 시간들에서 이 시대와 다른 시대를 찾아볼 수 있는가? 너희의 타락은 이렇게 심각하다. 그러니 그 타락이 심판을 불러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시대에는 오직 노아에게 이어진 계보의 소수의 사람들만 우리(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켰다. 그들의 이름은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였다.

이 중에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우리(하나님)에게로 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은 "창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화살이나 창이 과녁을 향해 쏘아지고 그것이 과녁에 닿으면 끝이 온다는 것이다. 므두셀라가 죽은 해는 노아 홍수가 일어난 해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우리와 동행한 것은 므두셀라를 낳으면서 우리(하나님)에게 세상의 종말에 관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종말에 관해 들은 에녹은 우리와 300년을 함께 했다. 예언된 종말이 온다는 것을 노아가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노아의 선조들에게 끝없이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을 이렇게 미리 말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에서 우리가 사람 지었음을 한탄하며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노아가 500세가 되기 20년 전이었다. 노아가 500세가 되면 심판이 100년이 남을 것이었다. 노아의 홍수는 노아 600세 되던 해에 있었다. 바로 그 홍수가 심판으로 온 것이다. 성경에 노아 500세가 언급되고 노아가 500세 이후에 셈, 함, 야벳을 낳는다는 표현이 창세기 5장의 마지막 절에 나온다.

노아는 오백 세가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창 5:32, 바른)

그리고 창세기 6장 1~7절까지 우리가 사람 만든 것을 후회하고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된다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다시 노아에 대한 말이 나오는 데 바로 등장하는 말이 노아는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이다. 또한 창세기 5:32절과 동일한 말이 반복된다. 바로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 세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 말이 반복되며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심판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가 핵심이 되어 노아의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들을 통해 또 땅에 인류가 뿌리내릴 것은 확언했다. 이것이 이 본문의 양괄구조다. 이 구조가 사실 핵심이다. 우리가 원한 것은 심판이 아니며 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을 통한 구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후회하며 심판을 말한 후 20년이 된 것이다. 이러한 연수의 계산은 상당히 치밀하고 정밀한 사람이 아니면 계산할 수 없다. 그러나 아주 정밀하여 노아와 그의 조상들에게 우리의 구원계획의 정밀성을 보여주기에는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판이 올 것이기에 그 심판을 이길 구원의 계획은 정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숫자들이 머리가 아파도 어쩔 수 없다. 이 계획을 설명하려면 이 숫자들을 나열할 수밖에 없다. 직접 이것을 계산하고 싶은 자들은 성경을 보며 천재적이면 며칠 만에 그리고 둔한 자들은 몇 년 만에 그 계산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을 계산해도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이 연표를 계산할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은 중도에 포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9노아의 내력은 이렇다. 노아는 당대에 의로운 사람으로 흠이 없었으며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10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 세 아들을 낳았다.(창 6:8~10, 바른)

우리는 아담이 타락하였을 때 이미 구원을 준비했다. 그리고 에녹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다. 그의 아들이 죽는 해에 심판이 올 것을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들을 마치 심판의 시계와 같이 여겼고 그 심판이 급속히 화살이 과녁에 꽂히듯이 올 것으로 생각했고 그 이름을 화살의 사람 또는 창의 사람이라 이름 지었다. 그 심판의 말을 들은 후 에녹은 겸허해졌고 그 이후 300년을 우리와 함께 동행하며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의 통치 아래 살았다. 에녹 자신은 노아가 출생하기 69년 전에 죽음을 보지 않고 우리에게 왔다. 그러나 노아도 자신의 할아버지 므두셀라가 죽는 날 심판이 온다는 것을 할아버지 므두셀라와 아버지 라멕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의 시작이 아담이며 그 일을 직접 들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에녹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직접 들은 에녹 할아버지는 죽음을 보지 않고 우리(하나님)에게로 갔다는 놀라운 사실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 므두셀라의 일생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자신도 우리(하나님)에게 480세에 심판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들었다. 자신이 600세 되는 해고 그 해에 므두셀라가 969세로 죽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노아는 그 후 20년이 지나 자녀를 낳았는데 그때 노아의 나이는 500세였다. 100년 후 정확하게 심판이 올 것인데 그 해에 자신의 아들들이 태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도 노아는 징조로 여겼다.
그때 므두셀라는 869세였다. 므두셀라도 100년 후에 969세가 되어 죽을 것이었다. 바로 그가 죽는 날 심판이 올 것이 미리 예언되어졌다.

이렇게 노아는 반복적인 확인 과정을 거치며 또 반복적인 예언을 들으며 살았다. 그러니 노아나 그의 아버지 라멕 그리고 심판 날 죽기로 예정된 므두셀라가 우리(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을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노아가 태어났을 때 그의 조상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노아라고 했다. 바로 위로다. 이 아이를 통해 땅이 위로를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모두 심판 가운데 사라질 것인데 이 아이를 통해 땅이 위로를 얻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아이가 우리의 구원을 실행한 선택된 아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01.3.2.1.2.1.1.1. 여호와의 눈에 있는 은혜


이런 가운데 태어난 노아는 당연히 우리와 함께 동행했다. 심판주인 우리를 따라 겸허히 살았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심판이 어떻게 올 것이고 그 심판에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 지를 들은 것은 당연했다. 그는 우리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의 눈 속에서 은혜를 발견했다. 그는 우리의 인류(아담)를 향한 목적이 심판이 아님을 알았다. 우리는 그 일을 당한 것이지 그 심판을 설계한 자가 아니다. 우리는 그 심판으로 인해 심히 고통스러워했다. 차라리 우리의 아이들이 당할 일을 보느니 차라리 그 아이들을 만들지 않았으면 하고 후회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죽느니 차라리 우리가 죽겠다고 결정했다. 노아는 우리를 바라보며 우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우리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창세기 6:8절에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남게 되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성경을 읽은 자들은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번역을 했다. 참으로 어리석을 수가 없다. 우리는 원래 인간들을 심판할 의도도 없었다. 자기 자식을 처형하기 원하는 부모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원래 너희 인류(아담)를 향해 은혜가 가득한 눈을 가지고 있다. 단지 노아는 그 우리의 눈을 보았고 우리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에 모세가 사용한 표현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어떻게 그 사건이 노아의 홍수 사건이냐? 이 사건은 노아의 구원 사건이다. 모든 우리의 자식들이 스스로 공멸의 길로 심판을 자초하는데 우리는 오랫동안 아담으로부터 에녹, 므두셀라, 라멕을 거쳐 노아에게 말하여 그들이 구원받을 길을 알렸다. 그런데 오직 그 구원의 길을 따른 것은 그들뿐이었다. 그들이 그 오랜 세월을 살며 수백 년을 다른 인간들에게 전했는데도 그들은 회개하지도 방주에 타지도 않았다. 비가 오지 않던 그 시대의 기후로 인해 배라는 것은 강이나 바다에서만 필요한 것이었다.[^0] 온 지구를 뒤덮을 홍수가 올 것이라고 육지에서 배를 만들고 있던 노아를 비웃었을 뿐이다. 또 비라는 것을 구경도 못해봤던 그들은 노아의 조상들이 비가 와서 물이 세상을 덮게 되고 심판이 오게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비웃고 비웃었다. 하루 종일 비웃었다. 그것도 모자라, 밤의 중턱이 넘도록 비웃었다. 우리는 심판을 의도하지 않았다. 오직 심판을 불러들인 것은 인간(아담) 자신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구원하려는 우리의 은혜를 비웃었다.

오직 노아와 그의 조상들만 우리의 은혜를 인정해 주었다. 신인 우리라도 자식들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낮추어 그들에게 다가가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 에덴에서 낳았던 우리(하나님)의 아들들도 오히려 우리를 배반하고 떠났고 그들에게 있던 성령도 더 이상 타락한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은혜를 주려 해도 그들은 우리를 거부했다.


01.3.2.1.2.1.1.2. 노아시대의 공멸 방지책: 세상을 위한 씨앗


우리의 공멸 방지책은 노아였다. 심판을 자초한 것도 인류(아담)이다. 노아 외에는 모두가 우리의 구원을 비웃었다. 자신들의 선악과의 지혜가 우리의 말보다 더 지혜로워 보였다. 우리가 너희가 그렇게 하면 심판이 올 것이라 했지만 믿지 않았다. 심판을 기정사실화 시킨 것은 그런 인류(아담)의 교만이었다.

그 심판을 벗어날 열쇠는 오직 인류(아담)에게 있었다. 자신들이 구원을 원해야 했다. 그래서 바로 그 심판을 벗어날 열쇠는 인류(아담)인 노아였다. 그가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은혜를 받아들이면 그는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전능의 능력으로 그를 도울 것이었다. 우리는 인류의 종말과 멸종을 막기 위해 노아가 할 수 있는 방주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지상에서는 그들의 권세가 우리와 같기 때문에 구원도 그들의 협조가 있어야 했다. 전 인류가 심판을 자초했다. 그 심판은 물로 올 것이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 물의 심판은 우리도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가 불러들일 물의 심판을 이길 수 있는 배를 만드는 것을 선택했다.

그 배에 대해 너희들이 상상하는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겨우 목선에 역청을 발랐을 것이라는 너희의 상상은 기가 막힌 것이다. 그것은 단지 배의 재료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게 일부만 기록되었다고 그것이 전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니 그렇게 큰 배가 그렇게 해서 버틸 수 있느냐? 너희는 그 시대에 타락한 가인의 후손들이 철과 구리합금을 다루는 테크놀로지를 개발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 시대에 왜 그렇게 심각한 심판이 초래되었는지 아느냐?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테크놀로지로 문명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인해 교만해졌다. 그 문명이 물로 심판을 당한다고 해도 자신들의 기술을 더 믿었다. 그리고 그들의 예측 기술로는 결코 지구를 덮을 수 있는 홍수는 올 수 없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악함과 폭압을 회개하지 않고 우리를 비웃었다. 그런 그들에 관해 고대에도 기록한 것을 읽지 못했느냐? 아틀란티스로[^1] 묘사되는 그들이 그렇게 미개했던 것 같더냐? 과연 그들이 미개하여 우리의 구원을 거절한 것으로 생각되느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지식나무 선악과로 배불렀고 교만해졌다. 그래서 첫 아담처럼 우리의 말을 믿지 않고 자신의 교만의 길로 가기로 선택한 것이다.

성경에 단순하게 기록된 것은 단지 모세 시대의 기술 수준으로 모세가 본 대로 창세기를 기록했기에 그의 이해의 수준으로 성경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 배는 우리가 지혜를 부어주어 노아와 아들들에게 만들게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홍수를 견디고 그들이 풍족히 쉬고 먹을 수 있었고 우리의 전능의 능력으로 보호하여 마지막 마른땅에 도달하게 하였다. 그 배는 모든 피조물 중 숨 쉬는 것들이 그 씨를 보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 하찮은 인간들이 어그러진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도 만들 수 있는 것을 우리의 지혜를 부음 받고 천년 정도를 살았던 노아와 그 자손들, 우리(하나님)의 아들들이 만들지 못하였겠느냐? 아니면 너희의 것보다 뛰어난 것을 만들었겠느냐?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다. 물론 그 모든 기술로도 지구를 덮을 엄청난 홍수를 견딜 수 없었다. 오직 구원은 우리였다. 우리가 전능의 능력으로 우리를 믿는 그들을 보호했다. 지구를 덮는 엄청난 홍수 속에서 우리의 손이 그들을 덮어 보호했다.

물이 넘쳐서 모든 숨 쉬는 것들을 죽였다. 그것이 심판이었다. 그런데 이 심판에서 빠진 것이 있었다. 바로 물에 사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호흡이 없었다. 그들은 아가미로 호흡하기에 공기로 숨 쉬는 호흡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실 그것은 호흡이라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심판한 것은 숨 쉬는 모든 것이었다. 거기는 새도 포함되었고 날아다니는 공룡들도 포함되었다. 물론 땅에서 숨 쉬는 모든 것들도 포함되었다. 공룡과 포유류와 그리고 작은 곤충들까지 숨 쉬는 모든 것을 심판했다. 너희는 이것을 의아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왜 심판에서 물속에 있는 것들은 빠졌는가? 궁금해 본 적이 없는가? 아마 대부분 없을 것이다. 성경을 그렇게 자세히 보는 인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표현도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심판한다고 한 것은 모든 생물이 아니라 숨 쉬는 모든 생물인 것이다. 노아가 만든 방주에는 수족관이 없었다. 물속에 있는 것들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01.3.2.1.2.1.1.2.1. 노아시대의 공멸방지책 설명을 위한 서설


노아시대의 공멸방지책에 대해 설명하려면 먼저 너희가 숙지하고 이해해야 할 부분이 필요하다. 너희가 그 기본 지식을 알지 못하면 내가 앞으로 설명하는 것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에 기본적인 숙지 사항을 나열할 것이다. 너무 난해해서 유사 이래 해석된 적이 없는 어려운 내용이지만 최대한 쉽게 나레이션 하려 한다. 그러니 정신을 차려 듣기 바란다. 그리고 이 내용이 너무 난해하여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탓하거나 이 글을 쓰는 작가의 글을 탓하지 말기를 바란다. 유사 이래로 한 번도 이를 이해하고 글로 적은 인물이 없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어려워서 머리가 깨어질 것 같고 너희 표현으로 두뇌에 랙 또는 프리징이 걸리더라도 그냥 읽고 넘어가자. 만약 쉽다고 느낀다면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01.3.2.1.2.1.1.2.1.1. 기식(氣息) 있는 것과 없는 것


너희는 설마 우리가 모든 생물을 죽일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가 죽일 수 없어 물속의 생물을 그냥 두었다고 생각하느냐? 과연 우리가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은 계속해서 오해하는데 심판은 우리의 의도가 아니었다. 숨 쉬는 것이든 무기호흡을 하는 것이든, 인간이든 동물이든, 우리는 그들을 사랑했다. 우리는 그들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단지 인간이 죄를 지었고 그에 따른 심판이 따라왔을 뿐인 것이다. 인간들이 자초한 심판이 물로 주어지는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인류(아담)가 호흡을 멈춘 것 즉 우리 중 성령을 거부한 죄로 인해 심판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흡 있는 모든 것들이 호흡을 멈추고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숨 쉬지 않는 것들이 상징하는 것이 있고 그것이 세상이며 바로 우리를 떠나고 성령을 떠난 존재들인 것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 난해한 것 같다. 이것까지 설명하려면 아마 너희는 이 장을 읽는 것을 포기하고 떠날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이 글을 쓰는 의도는 너희가 재미있게 이 글을 읽고 유희를 즐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너희가 실상을 깨닫고 심판에서 돌이키기를 원하는 것이다. 너희도 아담과 노아의 시대에 못지않은 테크놀로지와 교만으로 무장하고 우리를 비웃고 있다. 그런 너희에게 살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려 이 책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설명은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다.


01.3.2.1.2.1.1.2.1.2. 원리


이것을 설명하려면 세상이 만들어진 원리부터 설명해야겠다. 보이는 것들 즉 너희가 보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따라 만들었다. 보이는 세상을 보며 너희가 보이지 않는 것들 즉 영적인 것과 우리에 관한 것을 알도록 설계한 것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우리와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도 우리와 너희의 관계를 설명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또한 세상의 통치 질서도 너희가 우리를 닮은 형상으로 세상을 통치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세상에서 너희는 우리를 닮은 신의 역할을 하며 세상을 통치한다. 그 관계는 우리와 너희를 포함한 세상의 관계를 설명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와 같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 이 말은 사실 보이는 것은 우리 보이지 않는 영인 우리로부터 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창조한 질서도 우리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또한 그 창조 질서의 원리의 핵심은 우리가 너희에게 설명하기를 원하는 우리와 너희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창조한 의도들대로 우리는 너희를 자녀로 불렀고 너희가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01.3.2.1.2.1.2.1.2.1. 바람과 성령


성령은 우리 중 너희와 함께 하며 동행하는 자다. 그는 우리의 본질과 같이 영이다. 그리고 영은 너희 육신으로는 볼 수 없는 실존이다. 그래서 영과 가장 비슷한 피조세계의 것이 공기와 물이다. 특히 공기는 느껴는 지는데 그것이 잡히지는 않는다. 그리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그 힘은 때로는 강력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것을 삼키는 태풍이 되기도 한다. 그는 듀나미스이며 강력한 전능의 능력이다. 성령은 너희 인간들과 사귐이 있다. 그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함께 하는 사귐이다. 너희는 그 사귐에서 떠났다. 스스로 악을 선택하여 악독한 뱀의 자식이기를 자처함으로 너희는 숨쉬기를 거부하는 죄를 지었다. 성령과 교통 하며, 너희는 숨을 쉬듯, 우리와 친밀함으로 사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상적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며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다. 우리는 아비이며 어미다. 그리고 너희는 자녀다. 그리고 남녀의 관계로 비유하면 우리는 남편이고 너희는 아내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과의 사귐을 거부하고 대화를 단절한다면 그것은 배반이다. 남편을 버리고 다른 자에게 간다면 그것은 불륜이며 간음이다. 너희는 뱀과 간음한 간음녀다. 너희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 그와 음란한 간음을 행하였고 결국 너희는 창조자인 우리의 자리를 넘보는 악랄한 반역을 일으켰다. 그가 너희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그와 함께 죄를 범함으로 너희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 죽음의 형벌과 땅에서 저주받는 것 외에 그가 너희에게 더하여 준 것이 무엇이냐? 그와 반역을 하여 우리의 자리를 넘겨 달라고 하니 우리가 묻겠다. 우리가 내놓아야 하겠느냐? 그리고 우리가 내놓으면 다스릴 능력은 되느냐? 이 사악하고 무지몽매한 뱀과 그 간음녀야! 만약 너희가 그럴 능력만 되었더라도 우리는 버려두고 떠났을 것이다. 이 사악한 것들아. 우리는 너희를 눈 뜨고 볼 수 없으니 반드시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우리가 떠난다고 한들 너희가 창조의 능력자냐? 너희가 세상을 세상 속에서 충만케 하는 능력이냐? 만물을 만물 안에서 충만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희가 알기나 하느냐?

너희의 악한 행위가 더러워 참을 수 없지만 우리가 이러한 더러운 세상과 그 세상을 만든 너희를 버린다면 너희와 세상은 그 자체로 지옥도가 된다. 그리고 그 죄의 형별로 결국 꺼지지 않는 불못에 들어가 너희와 너희의 세상은 불살라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너희를 버릴 수 있느냐?

성령은 바람 즉 루아흐(대기)와 그 성질이 비슷하다. 우리가 바람을 창조한 원리가 그러하다. 물과 바람은 성령을 너희에게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너희(아담)와 우리는 숨을 쉬는 관계와 같이 쉼 없이 사랑하고 교제하는 관계였다. 루아흐가 너희가 있는 모든 곳을 채운다. 그리고 너희 안에 루아흐가 들락날락한다. 너희는 루아흐 안에 있다. 그리고 루아흐도 너희 안에 있다. 이것이 너희가 우리 안에 우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이다. 너희와 우리는 하나다. 요한복음의 이 표현들은 우리 자신들에게 적용될 때도 그리고 너희와의 관계에 적용될 때에도 친밀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친밀한 관계에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2] 그런데 너희는 도적놈, 양을 늑탈하는 늑대의 꼬임에 넘어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배반을 하고 반역을 일으켜 스스로 하늘의 존재에서 땅으로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너희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 난봉꾼 쪽~제비(족제비) 놈 악마에게서 본 남편인 우리에게 그리고 유괴범인 뱀 놈에게서 부모인 우리에게 돌아와야 했으나 너희는 그 쾌락을 사랑하여 그것을 거부했다. 그곳은 고통과 저주가 가득한데 너희는 얻을 수 없는 창조자의 자리를 탐하는 쾌락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쎄디스트들의 변태적 쾌락이다. 얻어맞으면 맞을수록 그 끝을 알 수 없는 변태적 쾌락에 빠져든다. 메조키스트인 뱀의 독에 취하여 그 독수를 끊임없이 들이키니 너희는 더욱 마비된 몸으로 그 매를 맞으며 쾌락에 빠져든다. 너희는 변태적 쎄디시트들이다. 그렇게 너희는 불형벌을 향해 달려드는 지옥의 불나방들이 되었다. 그렇게 하여 공의의 법 안에서 너희는 숨을 쉬지 않는 것에 대한 형벌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너희에게 속한 모든 세상도 너희로 인해 동일한 재판의 결과로 숨을 쉬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숨을 쉬지 않는 존재들인 물속의 존재와 같이 음녀가 앉은 곳이 되는 것이다. 바로 물속에서 숨을 쉬지 않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곳이 불의 바다, 형벌의 바다다. 너희는 그렇게 형벌을 불러들이는 유리하는 별들이며 불붙은 유성들이다. 그렇게 숨 쉬지 않는 너희는 결국 바다에 빠진 존재들과 같이 호흡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너희가 그렇게 물에 빠져드니 당연히 너희가 있는 땅에 물이 차오를 수밖에 없다. 너희가 물속에서 숨을 빼앗기고 죽으니 너희가 속한 모든 곳에 물이 차오른다. 그 물은 너희가 불러들였고 너희는 그 물속에서 숨쉬기를 거부하며 숨이 넘어가는 자살의 순간에 취할 수 있는 찰나의 변태적 쾌락에 빠져든다. 혹자는 말하길 그 숨이 넘어가는 순간의 쾌락이 모든 세상의 쾌락의 경험을 뛰어넘는다고 한다. 내가 보니 너희는 정말 악랄한 세디스트들이다. 너희가 그 쾌락으로 얻는 것이 무엇이냐? 그 숨이 넘어가는 순간의 쾌락이 너희를 죽이는데, 그리고 너희가 속한 모든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는데도 너희는 그 물속에서 숨이 넘어가는 쾌락을 즐기겠느냐? 너희로 인해 죽어가는 저 생물들을 보아라 그들의 눈동자와 그들의 호흡의 소리를 듣느냐? 제발 그 추악한 독사의 마약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해라 너희로 인해 죽는 저 생명의 기식을 가진 존재들의 가쁜 헐떡임이 느껴지지 않느냐? 제발 일어나 저 생명들을 구하자. 너 하나로 인해 저 모든 생명들이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제발 일어나 다시 공기를 들이마시고 숨을 쉬려무나? 그래야 너희도 살고 저 수많은 모든 생명들이 산다.

"그러나 너희는 숨 쉬기를 거부하는구나! 너희의 쾌락이 그리도 중하더냐? 저 수많은 생명 모든 생명의 기식(숨결)보다 너희의 쾌락이 중하더냐? 아이야 우리의 인공호흡도 거부하느냐? 살자 아이야 살아야 우리 얼굴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내 새끼야 마약에서 깨어나 일어나 살자. 이리 죽으면 나는 어찌 산단 말이냐? 네가 죽으면 나는 차라리 죽고 말 것이다. 그러니 내 생명을 내어 내피를 내어 너를 살릴 테니 아이야! 너는 죽더라도 살아나라. 아이야! 에덴에서의 그 즐거움을 잊었느냐? 다시 사자를 타고 달리고 익룡을 타고 날아보자. 만물을 호령하고 저 정상에 올라 크게 심호흡을 해보자. 그리고 그곳을 스치는 바람을 딛고 저 구름 위로 우리와 산책을 가자꾸나. 아이야 숨을 쉬어라. 나의 해독제를 마시고 독에서 깨어나 참 기쁨인 에덴의 기쁨을 다시 찾자꾸나. 아이야 일어나라! 아이야! 아이야!"


01.3.2.1.2.1.2.1.2.1. 물과 성령


물과 바다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하겠다. 이렇게 설명해야 하는 이유는 성경에 물과 바다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구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머리의 CPU와 여타 칩들이 타버릴 것 같아도 잘 참아주기 바란다.

물은 성령이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물이 솟아나야 그 물을 마시고 생명체는 대사를 진행시킬 수 있다. 물과 공기는 생명체의 에너지 대사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이 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다. 공기, 즉 루아흐에 대해서는 위에 많은 언급을 했으니 이제 물에 관해 설명하겠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호흡을 하는 존재들인 생명체들은 살아갈 수가 없다. 물은 생물들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이다. 물을 통해 양분이 공급되고 물을 통해 양분의 대사가 진행이 된다. 그리고 물을 통해 양분이 혈관을 따라 흐르고 운반된다. 그리고 물을 통해 세포의 벽을 통과하여 영양분이 혈관에서 세포로 이동을 한다. 그리고 대사의 과정에서 생긴 모든 노폐물도 물을 통해 신체의 메커니즘을 거쳐 최종배설된다. 물은 생명이다. 인간은 물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니 물을 마셔야 산다.

공기는 모든 곳에 존재해야 한다. 심지어 인간의 밖에도 인간의 내부에도 스며들어 모든 것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생명의 물은 인간의 내부와 밖에 존재하지만 결코 인간의 호흡을 담당하는 기관과는 만나서는 안된다. 물과 음식을 먹는 식도와 공기를 마시는 기도는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공기는 식도로 들어가도 된다. 심지어 식도와 십이지장, 위, 소장, 대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장기들에서는 소화의 과정에 가스 즉 공기를 만들고 배출하기도 한다. 사실 공기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물이 기도를 채우고 기도로 들어가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왜일까? 물은 생명인데 왜 물이 사람을 익사시키고 죽이게 될까? 물은 왜 공기와는 다르게 인간의 모든 것을 감싸면 안 되는 것일까? 물은 단지 필요할 때 마실 수 있고 씻을 수 있고 몸을 씻어 열을 식힐 수 있는 물질이다. 그것이 전체를 채우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죽음을 맞게 된다. 왜 그런 것일까?

물과 공기는 항상 공기는 위에 있고 물은 아래에 있게 된다. 물론 공기도 압력을 가하거나 온도를 낮추면 액화가 된다. 액화나 고체화가 된 공기는 물보다 무거울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액화된 공기가 아니라 기체 상태의 공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 질서와 위치가 분명하다. 공기는 하늘을 채운다. 그리고 바다가 있고 그 사이는 육지가 있다. 이는 세상이 만들어진 질서다. 인간은 세 곳 모두를 오갈 수 있고 그 세 곳 모두에 산다. 그리고 인간은 우리(하나님)의 보좌 앞 우리의 현존, 임재 앞에 나간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자리까지 인간은 드나들 수 있다. 그러니 천사들도 인간이 통치하는 것은 당연한 질서다. 인간은 하나님 아래에 피조계의 최강의 생명체다. 그러니 인간은 하늘과 땅과 바다 모두를 통치하는 통치자다.

하늘의 존재들은 가장 높고 그리고 육지의 존재는 하늘의 아래에서 하늘에 속한 공기를 마시고 산다. 바로 하늘과 교통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다에는 이렇게 숨 쉬지 않는 물로 호흡하는 존재들이 있다. 영적 의미에서는 숨 쉬지 않는 존재들이 악하다. 성령과 교통 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도 아닌 가장 낮은 곳에서 숨을 쉬지 않고 산다. 그러나 실상으로는 그들은 물속에서 용존산소를 통해 아가미 호흡을 한다. 그러니 그들도 호흡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있는 생물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영적 상태를 비유하여 만들어졌을 뿐이다. 사실 물질 자체를 놓고 보면 인간은 처음이나 타락한 후나 그리고 구원받은 후에도 하늘과 땅과 바다의 실체적 지배자다. 성경에서 바다를 따로 구분한 것은 다분히 영적인 것을 비유하여 육적인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이 질서를 버리고 하늘의 공기(성령의 통치와 소통)를 거부하면 세상도 질서를 버리고 바다의 물이 인간의 땅인 육지로 범람한다. 하늘과 땅, 바다의 질서, 즉 공기와 땅과 물의 질서가 반역으로 인해 역전이 되는 것이다. 땅에 속한 존재인 인간이 하늘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을 하면 땅 아래에 속해야 할 바다가 반역을 하여 인간의 땅을 덮쳐오는 것이다.

공기는 물이 드나드는 길을 드나들 수 있다. 왜냐하면 질서상 상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은 공기가 드나드는 길로 다닐 수 없다. 물은 결코 질서상 상위의 존재인 공기의 길을 탐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물이 기도를 막으면 인간은 죽음을 맞이한다. 모든 생물들도 물이 기도에 들어오면 죽게 된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질서를 보이는 것들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이다. 성경 안에는 이러한 설명방식의 비유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그러니 창조질서 속에 숨겨진 영적 원리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크나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내가 이것을 말하는 의도는 또 신비한 비밀을 스스로의 개똥철학을 통하여 발견하여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맥락을 벗어나는 길로 사람들을 오도(誤導)하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과 전체 자연 질서에 맞는 이치와 문맥에 맞는 해석을 통해 오랜 세월의 검증을 통해 시험된 것을 성경 해석에 그 성경의 허락된 문맥하에 사용해 보라는 것이다.

보이는 질서는 모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그 이면에 있는 영적 세계의 질서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지배를 받는다. 땅은 하늘 아래 있어 그 지배를 받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그 질서를 불만하여 인간이 하늘을 향해 반역을 하면 땅 아래에 있는 물도 땅의 인간들을 반역하여 일어나 인간들을 땅을 덮쳐온다.

이때 물의 역할은 결코 생명의 성령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질서 상 땅의 아래에 있는 바다를 뜻하는 것이다. 질서 상 땅의 인간이 하늘을 거슬러 반역을 일으키면 질서 상 땅의 아래에 있는 물이 반역하여 인간들의 땅을 덮치는 것이다.


물은 공기가 되기도 하고 수증기가 되어 필요에 따라 쓰인다. 만약 공기 중에 물이 없다면 너희 생명체들은 그 건조한 공기를 들이키고 폐가 말라죽어갈 것이다. 이처럼 공기 중에도 물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모든 생명이 있는 곳에는 물이 필요하다. 심지어 사막에도 조금의 물이라도 존재하는 그곳에 생명이 있다. 안개를 통한 물이라도 공급되지 않으면 사막에는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다. 이때의 물은 생명을 공급하는 생명의 성령을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되어지는 창조물이다. 비유로 사용되어질 때도 그 비유의 맥락과 문맥 그리고 메타내러티브에 맞는 해석을 통해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비유이든 세상을 통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비유이던 모두 한 원리다.

타락 후 바다의 권세가 빠진 이유는 눈에 보이는 바다의 존재나 그 속의 생물의 존재들이 악해서가 아니다. 단지 영적 의미에서 바다가 뜻하는 영적 상태에 있는 장소와 그 장소에 속한 자들을 뜻하는 비유일 뿐이다. 우리(하나님)를 대리한 통치는 우리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곳, 즉 하늘과 땅을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적인 의미에서 바다는 성령을 거부하는, 즉 우리를 거부하는 반역자들의 곳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영적 비유지 바다의 물질세계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에서 나오는 바다는 눈에 보이는 바다가 아니다. 숨 쉬지 않는, 즉 성령과 교통 하지 않는 악한 세상적 존재들이 거하는 어둠일 뿐이다. 우리의 통치를 거부하는 자들의 세상이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바다가 악하다거나 그 바다가 악하여 심판을 당한다고 생각지는 말기를 바란다. 물론 마지막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바다가 넘쳐 반역한 인간들을 덮쳐왔다. 그래서 우리는 노아를 선택하고 그와 그의 자손들을 통해 방주를 만들고 그 시대의 공멸에서 그들이 구원받도록 인도했다.[^3]


딕테이션(Dictation)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작가를 이번 주에는 더욱 아프게 하고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이 주제는 설명하기 너무 난해할 것이라 그가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스스로 이성적인 말과 설명을 통해 전달하기 너무 어려운 주제다. 그래서 그를 거의 정신이 없이 아프게 하여 딕테이션 하듯이 나의 글을 적게 하고 있다. 내가 부어주면 거의 수정도 하지 못하고 그 글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리고 그 글을 쓰면서 에너지가 부족하여 수많은 오타들이 나는데 그것을 수정하는데도 힘이 들어 계속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의 정신적 육체적 기력이 가장 많이 빠졌을 때에 이글의 대부분의 분량은 작성되었다. 그가 작성하여 올리고 있는 글들 중 너희가 읽어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문장들은 대부분 이런 때에 딕테이션 하듯 작성된 글들이다.


01.3.2.1.2.1.2. 무지개 언약


우리는 노아와 그 가족을 구하고 나서 공멸 방지책을 만들었다. 그런데 인간들에게 그 가능성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인간들은 언제나 죄를 향해 달려가며 피 흘리는데 빠르다. 그러니 그들은 언제나 공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숙명적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법으로 묶어 우리가 그 법을 지킴으로 인간들이 공멸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방지책을 고안했다. 인간들에게는 가능성이 없으니 우리 스스로 구원자가 되어 구원책을 마련하도록 우리를 법으로 묶는 것이다. 원래는 공의의 법으로 인해 우리가 인간을 심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들을 구하기 원한다. 그래서 또 법으로 인해 공의 상 인간을 우리가 구할 수밖에 없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을 법에 묶었다. 그래야 합법적으로 인간들이 공멸에 이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노아에게 준 무지개 언약이다.

노아가 방주를 열고 나왔을 때는 땅이 마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는 수증기가 되고 또 수증기들이 짙어지면 더 큰 물기의 입자들이 되었다. 안개와 같기도 하고 비 온 뒤에 피는 호수와 산계곡의 물안개와 같았다. 안개 자체로는 무지개가 생길 수 없다. 입자가 좀 커져야 한다. 그때 땅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그 물의 분자들을 자연의 법칙을 통해 뭉쳐 빛을 산란, 굴절시켜 무지개를 만들 수 있었다. 노아의 가족들은 그때 공기 전체가 물기로 가득 찼기에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땅아래에 까지 층층이 비추는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그런 무지개는 그런 환경이 아니면 다시 발견되기 어려운 것이다. 혹시 너희 중에 하늘에 쌍무지개나 세 개의 무지개가 뜬 것을 본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현상도 상당히 기이한 현상이다. 그런데 그때 노아가 본 것은 그 무지개의 층을 셀 수도 없을 만큼 하늘을 가득 채운 무지개의 오로라였다. 그때는 땅과 공기가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고 그 포화도가 높아서 입자들이 뭉치기 쉬웠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질 것을 우려한 우리가 바람과 햇빛을 통해 그것이 비가 되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안개보다 큰 물의 입자들 즉 빛을 산란하여 무지개를 만들 수 있는 물입자들이 크기별로 공기 중에 가득했다.

그 무지개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준 언약은 이러했다.

(창세기 8:21~ 9:17 바른)
21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사람이 마음으로 의도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내가 이번에 했던 것처럼 모든 생물을 다시는 멸하지 않겠다. 22땅이 있을 동안 심고 거두는 일,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그리고 낮과 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9장
1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2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다. 너희 손에 이것들을 넘겨주었다. 3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 양식이 될 것이니, 푸른 채소와 같이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4다만 고기를 그 생명인 피째 먹지 마라. 5반드시 내가 너희 생명이 되는 피를 찾을 것이니, 짐승이면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이면 그에게서 내가 생명의 피를 찾겠다. 6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다른 사람에 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니,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7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 차고 그 안에서 번성하여라."

8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보아라, 내가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니, 너희와 너의 후손과 10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명체, 곧 방주에서 나온 땅의 모든 생물과 세운다. 11내가 너희와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니, 모든 육체가 다시는 홍수로 멸절되지 않을 것이며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는 없을 것이다."

12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내가 대대로 주는 언약의 표이다. 13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으니, 그것이 나와 땅 사이에 언약의 징표가 될 것이다. 14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그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나와 너희 사이, 그리고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에 맺은 내 언약을 내가 기억할 것이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16그 무지개가 구름 속에 있어서, 내가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17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나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육체 사이에 세운 언약의 징표이다."


이렇게 무지개가 있는 동안은 인간들에게 첫 아담에게 준 언약과 같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이 언약을 공멸과 자멸을 불러들이는 악마의 DNA를 가진 인간들을 대항해 어떻게 지켜내는지는 다음화 [[01.3.2.1.2.2. 바벨탑 새대의 공멸]]에 이어 설명하겠다. 또한 위에 나와 있는 우리의 약속의 구체적인 의도와 뜻도 함께 밝히겠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너희가 사는 시대 21세기에는 너희들의 악마적 욕심으로 점점 무지개가 사라지고 있다. 너희가 다시 마지막 공멸을 불러들이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너희는 근심하고 근심하라. 살길을 간구하라. 무지개가 있는 동안에는 너희의 공멸을 막지만 너희가 무지개를 없애 버리는 시대에는 우리의 언약은 무효가 된다. 우리 언약은 무지개가 표징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다음다음화 [[01.3.2.1.2.3. 마지막 공멸의 시대]]를 통해 이어 나가겠다.





[^0]: 홍수 이전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가?


온실속을 생각하여 보라 온실 속에 습도가 높아져도 비가 오지 않는다. 심지어 겨울이라 밖의 온도가 추워 온실의 벽과 천장에 물방울이 맺히더라도 비가 오지 않는다. 그냥 벽을 따라 흘러내린다. 태초에도 이와 비슷했다. 지구 대기권 위의 물이 있어 이는 온실의 벽과 같은 역할을 했다. 습도가 높아 물기가 생기면 비로 내리기 전에 이곳에 흡수되었다. 물의 벽이었기에 물방울이 맺히면 물의 응집력이 높아 자신 안으로 그 물방울을 흡수했다. 그리고 지구의 습도가 낮아지면 궁창 위의 물의 벽에서 지구에 습기를 보충해주었다.


또 구름이 생기고 그곳에서 물방울이 생겨도 지구와 궁창 위의 물의 층 양쪽의 인력을 같이 받게 된다. 처음 구름이 생길 때도 동일하다. 그런데 태초에는 적당한 양의 습도로 이미 조절되어 구름의 양이라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바로 궁창 위의 물의 층으로 흡수 되었다. 또한 궁창 위의 물로 인해 지구 대기권 상층의 온도가 그렇게 낮지 않았다. 지구 전체의 온도가 온실과 같이 균등했으므로 사실 고도에 따른 온도차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온실의 특징이다. 고도가 올라감에 따라 온도가 낮아지고 그로 인해 이슬점에 이르러 구름과 비가 생기는 현상은 없었다. 온실 안의 적당한 습도가 유지가 되었고 늘 그런 습도가 유지가 되니 사실 땅도 적셔져 있었으며 인간도 가습기가 틀어진 적당한 습도에서 살았다. 그렇다고 너무 습도가 높거나 덮지도 않았다. 지구보다는 차가운 벽의 온도 탓에 습기도 적당하게 제거가 되었다. 온도도 항상 적정선을 유지했다. 궁창 위의 물이 열과 빛을 어느 정도 차단하고 또 궁창위의 물 밖은 낮에는 127도 밤에는 -173도의 온도차로 지구의 온도가 전체적으로는 24도를 유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낮에는 햇빛이 투과되어 들어와 이보다 높은 온도로 올려 주어 공룡들과 열대지역의 식물들도 자랄 수 있었다. 추위가 없었으며 극심한 더위도 없었다. 지구 상에 사막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곳이 균일하게 아름다운 풀과 나무가 자라 났다.


[^1]: 내가 아틀란티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아틀란티스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틀란티스가 홍수 이전 시대를 모티브로 하여 창작되어진 것이므로 홍수 이전의 문명과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짐작하여 보라는 뜻이다.


[^2]: 삼위일체 안의 친밀함을 표현한다면 맞는 것이지만 그 표현이 삼위일체를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은 요한복음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삼위일체에서 하나라고 하는 것과 요한복음에서 친밀함으로 하나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소위 너희 중 조직신학이나 각 신학의 분과들을 탐구하는 교수들이 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맞는 성경구절을 제시하는데 이렇게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제시하는 것들이 한 번씩 있다. 이는 참 아이러니 하다. 교리가 성경에서 나와야 하는데 어떻게 교리에 성경을 맞춘다는 말이냐?


[^3]: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KT4pZmgmUMY&ab_channel=%EB%82%B4%EC%85%94%EB%84%90%EC%A7%80%EC%98%A4%EA%B7%B8%EB%9E%98%ED%94%BD-NationalGeographicKorea

이 영상은 이럴 수 있음을 예시로 든 것이다. 노아 홍수가 이렇게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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