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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Feb 20. 2024

님아 날 할아버지라 부르지마오

감성 에세이 16

[에세이] 님아 날 할아버지라 부르지마오

한결


흰 머리가 부쩍 들었다. 거울을 비추어보며 한 방울 두 방울 눈 내리듯 내려앉은 지난 세월의 잔상들이다. 처음엔 검정색 아스팔트위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송이같은 형상이었건만 지금은 싸리 눈 내리듯 듬성듬성 하얗게 덮였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 들은 만나자마자 그동안 왜 이렇게 늙었냐며 세월을 한탄했지만 난 나이들어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애써 무덤덤한 척 했다.


지난 토요일이었다. 오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와 오후엔 회사에서 밀린 일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녁 여섯 시가 약간 안된 즈음 후문을 통과해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갑자기 여자 꼬마아이 두 명이 후다닥 튀어나온다. 30대 후반 쯤 되었을까. 뒤에서 따라오던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뛰어다니는 아이 들을 말린다.


"얘들아!  그렇게 뛰어다니면 할아버지 다치셔!

주변을 둘러보니 할아버지가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나뿐이다. 그럼 나인가. 내가 할아버지

인가.


'저 아줌마가 눈이 어떻게 되었나. 누구보러 할아버지래'


못들은 체 했지만 씁쓸한 속 마음까지 감출 길 없다. 우리나라 노인연령 기준이 65세이고 난 그 연령을 넘기는 커녕 아직 60도 안되었고 내 자녀들이 아직 결혼 전이어서 손주도 없는데 할아버지라니 머리가 띵하다. 아파트 현관 문을 들어가기 전 잠시 벤치에 앉는다.


그동안 어떤 이들은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며 검은 머리와 섞인 흰머리가 어색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고 어떤 이들은 조금 더 젊어보이지 않겠냐고 이왕이면 염색을 하라고 권유했었다. 그럴때 마다 나 또한 염색을 고려했지만 염색을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와 머리의 경계선이나 구렛나루부터 스물스물 기어올라오는 것이 보기 싫을 뿐만 아니라 그 때마다 또 뿌리 염색을 하는 번거로움,  그리고 흰머리는 자연스러운 현상일뿐만 아니라 열심히 살아온 내게 세월이 준 훈장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그냥 지나쳤었다.


집에 들어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아무래도 내일은 꼭 염색을 해야겠다. 머리털 다 빠지고 나면 하고 싶어도 못할터 노인으로 가기전 마지막 발악이라고 해도 좋다.

일요일 오전 미용실을 간다.


"머리 염색해주세요."


"그렇게 하라고 권해 드려도 않하시던 분이 어쩐 일이세요?"


"염색도 할 수 있을 때 해야죠. 젊게 살고 싶어서요"


물론 염색을 한다고해서 본 모습의 흰머리가 머지 않아 드러날 것이고 외관을 위장하는 것이 실제 젊어지는 것은 아닐테지만 기분이라도 나아지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이것도 어찌 보면 스스로를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잘하는 선택일 수도 있겠다. 가는 세월을 무엇으로 잡고  오늘 백발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만 아직 할아버지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다.


기분 전환도 할겸 커피숍을 찾았다. 아무도 내 머리가 흰지 검은지 신경쓰지 않는다. 또한,  할아버지가 갑자기 뛰어나오는 아이들을 피할정도로 순발력이 좋을리도 없는데 물론 복장도 젊게 입었고 말이다. 그런데 왜 그냥 지나갈 것이지 어제 그 아줌마는 왜 그랬냐고. 왜 그랬을까. 왜 내가 할아버지냐고 창밖으로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유리창에 비쳐 나의 얼굴이 보인다. 문득 그 아줌마가 할아버지라고 부른 덕택에 흰 머리 염색을 했고 덕분에 당분간이라도 젊어진 머리카락을 갖게 되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라는 울림은 떨쳐버릴 수가 수 없다.


나도 모르게 나즈막이 중얼거린다.


'님아 날 할아버지라 부르지 마오'

위 배경사진 네이버. 아래 사진 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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