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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저녁

휴식 에세이

by 한결

[에세이] 여름 저녁

한결


후덥지근한 공기가 세상을 지배하는 저녁, 밥상 차리기도 귀찮고 가볍게 요기나 할양으로 집을 나선다.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오히려 집안보다 바깥이 더 시원하다. 어디 멀리가기는 귀찮고 시원한 물회 한 사발 들이킬까 둘러보던 중 마침 동네에 딱 한군데 있는, 지금껏 한 번도 찾은 적 없는 꼬막집이 눈에 들어와 무작정 들어가 본다. 메뉴판을 보니 꼬막, 갑오징어, 홍합, 고추부추 전 등이 있다. 아직 저녁을 먹지 않은 관계로 식사 대용으로 고추 부추전을 시켰더니 해물이 잔뜩 들어 있는 커다란 피자만한 전이 나왔는데 아주 먹음직 스럽다. 잘 익어 아삭 바삭하게 생긴 모습과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니 입안에선 빨리 넣어달라고 군침이 요동을 친다. 젓가락으로 한 점 크게 떠서 넣으니 밀가루 대신 전분을 넣어 밀가루 특유의 냄새도 않나고 바로 삶은 꼬막과 갑오징어, 매콤한 고추에 몸에 좋은 부추까지 어우러져 매콤한 맛이 입맛을 돋구며 해산물이 어우러져 입안에서 춤을 춘다. 거기에 시원한 맥주 한 모금 들이키니 더운 여름날의 꿉꿉함은 온데 간데 없고 세상 즐겁다.


'그래 이맛이야. 오늘 아주 딱인데. 어쩐지 여기 들어오고 싶더라."


야채와 해물이 잔뜩들어 있는것이 가격이 비싸도 마음에 쏙 들어 회사 후배들 한 번 데리고 와서 동동주에 한 껏 신나고 싶은 맛이다.


이러한 시간은 내게 무한한 행복을 준다. 여행을 떠나 있을 때 현실의 옥죄임을 잊고 즐기듯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고 부드러운 목넘김과 맛의 즐거움에 빠져 든다. 배고플 때 음식 앞에서 어떤 아름다운 광경도 견주지 못한다. 그러니 어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그토록 열기를 뿜어대던 콘크리이트 바닥의 열기와 볕의 강렬함을 뒤로 선선한 저녁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시간이 고맙다. 더운 한낮이 있었기에 저녁이 더 고마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뻐근한 어깨에 마사지를 받듯 긴장감과 딱딱함 속에서의 하루가 부드러워지는 사이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적당히 배가 부를 때쯤 일어서 아무도 날 바라보지않고 아무도 날 찾지않는 저녁을 걷는다. 도시의 낮과 극명히 대비되는 시간, 그 안에는 차분한 색깔의 여유가 있다. 아주 천천히 급할 필요가 없다. 느리고 부드럽게 호흡하면서 붉은 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이제서야 하나 둘씩 잠에서 깨어나는 가로등의 불빛을 조우하면서 살랑거리는 바람의 어루만짐에 나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동네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평화롭다.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는 길, 삼삼 오오 모여서 말을 나누는 어르신들과 공놀이를 하는 아이 들이 보이고 초록의 나무들과 잔디밭은 강아지의 친구가 되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여름은 한낮엔 숨이 턱 막히는 더위와 피할 수 없는 폭우를 주지만 오늘의 저녁처럼 목가적 풍경과 안정된 편안함도준다.


점점 저녁을 밤이 덮어가는 시간, 무거웠던 하루를 내려 놓으며 생각에 잠긴다. 삶은 늘 그렇다. 별것 아닌 것같지만 별거아닌 것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 어쩌면 단순한 하루의 마무리가 어떤 이에게는 커다란 소망일 수 있다는 것, 먼 곳에가서 멋진 풍광을 보고 맛난 음식을 먹는 것도 좋지만 맛 난 전 한장과 느리게 걷는 여름 저녁 나절의 몇 시간도 오늘이 행복한 이유라는 것, 이렇게 흘러가는 계절이 지난 것과 다르고 앞으로 맞이할 시간과 다른 유일함이라는 것, 오늘이 행복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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