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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휴식 에세이

by 한결

[에세이] 여행

한결


퇴직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지 엊그제 대학에 입학하고 취업한 것 같은데 벌써 은퇴라니 어떤 날의 하루는 길고 어느 시기는 힘들었고 그 와중에 기쁜 일, 슬픈 일도 있었고 희로애락의 인생열차는 내게 어떤 말도 없이 달리고 달려 벌써 종점을 향하고 있다. 지나고 보면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이 감사하다. 지금까지 나를 써준 직장에도 감사하고 점점 나이들어감에 따라 쇠약해진 건강도 있지만 그래도 이만큼 버티게 해준 스스로에게도 감사하며 살아온 모든 날들이 한 장 한 장 포개져 내 삶을 이루었음을 돌이킨다. 어떤 날은 좀 더 잘 살아보려고 또, 어떤 날은 스스로에게 실망하며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이루고 싶은 것들에 대한 욕망, 현재의 것에 만족하지 못한 불만과 한숨 들이 나를 지배하는 시간 들이 있었으나 살아가면서 겪어야하고 겪을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이다고 생각하면 때가 되면 지나갈 것 들이었다. 치열하고 처절했던 고민과 갈등의 시간 들도 당장은 숨막힐 듯 하나 지나고 보면 '그땐 너무 힘들었어'라는 말로 지금의 나를 보며 '잘 버티었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면 아마도 어린 시절이었을 것이다. 고향에서 딱 12년을 살았다. 경기도 북단, 연천에서의 까까머리 초등학생시절은 내 삶의 정서에 바탕이 된 곳이다. 요즘처럼 더운 여름이면 친구들과 냇가에서 멱을 감고 물고기를 잡았다. 폭이 넓었던 임진강 지류인 냇가엔 나무 다리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서 뛰어내리며 한바탕 물놀이를 하다가 산에 올라가 개암을 따먹고 잡은 물고기를 집에 가져가면 어머니가 매운탕을 끓여주셨다. 내가 뛰어 놀던 다리는 후에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더니 지금은 뛰어내릴 엄두도 나지 않는 엄청 크고 멋진 다리로 바뀌었지만 다리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과 동물과 새들이 살고 있는 산을 연결해주고 나와 자연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냇가는 자연의 시작점이었으며 산과 들은 내 마음을 실어둔 놀이터였기에 늘 고향은 내 가슴 한구석에 있었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시점, 귀촌과 귀농같은 거창한 이주는 아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한 며칠은 지금의 집에서 또,며칠은 고향에서 지낼 생각인데 어쩌면 그 기간은 어렸을 때 냇가의 다리를 건너 산으로 올라가듯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한 연습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다리의 삼분의 이 이상을 지나온 지금 아마 내가 그나마 마지막 불꽃을 태울 신체적 활동의 시기는 앞으로 약 십년 남짓 될 것이다. 그 시간 만큼은 이제 나를 위해 쓰고 싶다. 조그맣게 휴게형 쉼터를 짓고 뜰에는 정자를 만들어 여름 무더위를 피해갈 나무아래서 적당한 바람을 맞으며 고기도 굽고 수박도 쪼개먹고 밤이면 모기장을 둘러놓고 풀벌레 소리, 개구리 소리를 자장가 삼아 여름밤을 즐길 것이다. 겨울엔 화목 난로를 설치해 '타닥타닥' 나무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싶다. 혼자 걷는 들길은 쓸쓸하기보다는 꽃과 나무, 흙과 풀들이 친구가 되줄 것이고 그곳에서 부모님과 동무들과 함께 했던 시절을 회상할 것이다.


인생은 길고도 짧은 여행이다. 나고 자라서 늙고 자연으로 돌아가기까지 어떤 장소와 장면을 만날지 설레는 여행, 청년,장년, 중년 노년기까지 시기별로 또, 그 시기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날 들, 그리고 만나는 사람 들, 시시각각 바뀌는 장소 들, 짧든 길든 삶에는 길이 있고 여정이 있다.여행을 다녀와서 훗날그 때 찍은 사진을 꺼내 보며 즐거웠던 시간을 추억하듯 노년을 앞둔 지금 남은 여정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중요한 일정이 될것이다. 월요일 아침, 여행의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목적지가 회사든, 출장지든 행복한 마음으로 떠나보자. 그 어떤 것이든 지나고 보면 가슴안에 소중한 또 하나의 사진으로 남아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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