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에세이
[에세이] 숯불
한결
소독약과 함께 인분, 지린내가 섞인 냄새가 스멀스멀 코를 자극한다. 요양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외출시켰가 복귀시키는 길이다. 병실마다 침상에 할머니들이 가득하다. 그 중 말을 할 수 있거나 움직일 수 있는 분은 몇 분 되지 않는다. 어떤 분은 죽을 떠 먹여 주어야하고 어떤분은 코에 호스를 넣어 음식물을 공급하는 콧줄식사를 하고 있다. 아예 상하체는 커녕 손가락도 움직이지 못해 꼼짝 않고 누워있어야하는 분도 있다. 갑자기 한 할머니가 울기 시작한다. '꺼어어 꺼어억'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이 병실 전체에 퍼진다. 그곳은 보통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다. 마치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 불시착한 선원처럼 언제 구조될지 모르고 평생 섬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 그런 모습이다.
현대의학이아무리 발달했다고 늙음은 어쩌지 못한다. 버티다 버티다 가족 들이 돌봄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시설로 가는 것이다.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넘어지거나 쓰러져 고관절이라도 부러지는 날엔 수습이 불가능하다. 연로한 노인은 수술이 힘든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도 그랬다. 뇌경색에 알츠하이머,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기 전에 어떻게든 집에서 생활해보려고 몇년 간 안해본게 없을 정도로 버티고 버티었지만 자꾸 하루에도 몇차례씩 넘어지면서 골절사고가 일어나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는 스스로 화장실 거동이 어렵다. 기저귀를 차고 배설을 한다. 집에서 이를 감당하려면 24시간 꼬박 붙어있어야한다. 재활치료를 하며 침까지 맞으며 집에 돌아갈 날만 기다리지만 완치는 기적에 가깝다. 그낭 이 상태 유지만 해도 다행인 것이다.
돌봄을 해보지 않은 사람 들은 그 부침을 모른다. 그러니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보내는 것을 막심한 불효를 저지르거나 고려장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또, 당사자는 가족들로부터 버려진다고 생각하지 가족 대신 보호를 받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죽어도 내 집에서 죽어야지 어딜 가냐는 의식은 노인에게 변할 수 없는 고정된 못으로 박혀있다. 의학의 발달은 수명을 연장시켰지만 사회는 거기에 수반하는 제반 조건들은 갖추지 못했다. 그러니 돈이 없으면 경제적 형편에 맞는 곳으로 가야하고 서러운 노화와 질병의 앞에 이르러서도 계층의 분화가 일어난다. 초고령사회의 아이러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생활을 하신다. 뇌경색에 알츠하이머로 혼자 걷지를 못하시고 보행기를 사용해도 누가 부축해주어야 하지만 정신은 여전히 멀쩡하시다. 병원에서는 깔끔한 할머니로 정평이 나있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세면 후 화장을 하시고 두 달에 한 번씩은 파마와 염색을 해야하며 병원에서 기저귀 차는 것이 싫어 외출해서 집에 오시면 하지도 못하는 기저귀를 혼자 갈겠다고 고집을 피며 꼭 화장실에가서 용변을 보신다. 외출로 집에 가면 아버지와 고정된 대화 패턴이 있다. 먼저 약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부터 시작해서 운동을 많이 시켜주지 않는다, 간병인이 불친절하다, 기저귀를 제 때 갈아주지 않는다 등으로 끝나는 불만 언급과 병원에 있어도 효과가 없으니 집에 돌아와야한다라는 본인 나름의 합리적 이유를 대며 아버지를 볶아 대신다. 아버지는 당신이 오면 내가 병원에 들어갈 것이라며 질색팔색을 하신다. 점식 식사 후 보행기를 의지해 운동을 하신다. 걸으면 나으신다고 굳게 믿고있어 주말에 외출하는 것이 낙이라 한 주라도 외출을 빠뜨리면 난리기 난다. 이걸 생각하면 거의 하루 종일 침대 위의 삶이 싫으실테니 슬프고 애처롭기까지 하다.
집에 있던 큰아이가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여 저녁으로 고기집을 간다. 빨갛게 달아오른 숯불위에 불판이 올라가고 지글지글 고기가 구워지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현재 잦아들기 시작하는 꺼져가는 불씨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아궁이에 마른 나뭇가지를 넣고 불을 붙인다. 그 위에 장작을 넣으면 안타는 듯 하다가 활활 타오른다. 불길이 너무 치솟아 가까이 갈수 없을 정도로 화력을 뽐내는데 불길이 치솟을 땐 그리 뜨겁던 것이 잦아들면 어느새 빨간 불덩이로 변하고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꺼져가는 불씨만 남는다. 계속 입으로 불어보지만 결국엔 꺼지고 새까맣게 타다만 나무 조각 몇 개와 재만 남는다. 튼실하고 단단했던 장작은 오래갈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빨리 자신을 소진시킨다.
지금 아프신 어머니도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자신을 태운 끝에 이젠 꺼져가는 숯불처럼 노쇠하고 병든 육신만 남은 것아닐까. 그마저 남은 불씨까지 꺼져버리기 전에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하는데, 누구나 마지막 길은 거의 같을 것이고 훗날 나 역시도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걸을 지 모르는데 불평하고 몇 시간을 버거워하는 나의 모자람이 부끄럽다. 생각컨대 내게 주신 부모님의 사랑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를 생각하니 울컥하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고기를 먹어갈수록 배는 부르고 숯 불은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