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에세이
[에세이] 싸대기
한결
초등학교 5학년 경기도 북부의 깡촌에서 자라던 내게 일생 일대의 큰 변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서울로의 전학이었다. 겨울방학이 일주일정도 남은 어느 날 주말 서울로 전학을 가야한다는 아버지의 청천벽력같은 일방적인 통지에 크게 당황했으나 그 시절은 내 뜻이 중요한 시절이 아니었다. 갑작스런 가족과 친구 들과의 이별로 난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서울 청량리 먼 친척 할아버지 댁으로 거처를 옮겨야했는데 할아버지 댁은 청량리 시장에서 포목점을 운영
하셨더랬다.
청량리 소재 H국민학교에 어머니와 함께 월요일 등교를 했다. 때는 날씨가 매우 추웠던 겨울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교실밖에서 나를 보고 계셨고 급우 들에게 인사를 한 후에 선생님께서는 난로 옆자리 빈 자리로 배정을 해주셨다. 내심 난 전학왔다고 배려를 해주시는구나하고 감동했고 어머니는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친척 할아버지 댁으로 가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가시자마자 선생님이 나를 호명하셨다.
"너 맨 뒷자리로가고 신○○ 앞으로 와서 앉아"
난 뒷자리로 쫓겨나듯이 뒷자리로 가야했고 나중에 알고 봤더니 난로 옆 자리로 간 아이는 집이 좀 사는, 그래서 그 아이의 어머니가 선생님도 자주 찾아가고 촌지도 심심치않게 챙겨주던 쉽게 말해 치맛바람이 좀 센 집이었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난 이 사실을 끝까지 어머니께 말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난 다시 두 달 정도 고향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는 어머니도 담임선생님께 촌지를 챙겨 드렸고 또 서울 생활에 적응한 덕에 국민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어느덧 2학년이 되었는데 학교에서 제일 무섭다는 '메두사'라는 별명을 가진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 되었다. 그 시절에도 요즘 학생들처럼 일진이 있었고 문제학생들이 있었다. 그런데 일진 중의 한 명인 녀석과 친해지게되고 어울려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엔 중학교 3학년 때 연합고사를 봐서 일정 점수를 넘으면 인문계, 점수가 낮으면 고나 상고에 가는 실업계를 가야했는데 난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열심히 공부를 하던터라 성적이 향상되고 있었기에 선생님은 날 이뻐하셨다. 그러던 어는 날 일진인 같은 반 학생과 친하게 되었고 그 아이가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여 함께 과외를 다니기로 했는데 그 때문에 좀 어울렸었다.
선생님이 어느 날, 교무실로 날 부르신다.
"야 임마 너 왜 이 땡땡이랑 어울려 새꺄!"
다따고짜 싸대기를 연타로 갈기셨다. 바로 이 땡땡도 교무실로 불려갔고 그 후 이땡땡과 서로 거리는 멀어져 아예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연합고사가 끝나고 난 커트라인을 훨씬 상회하는 점수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평범한 고등학생의 삶을 살게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맞은 싸대기는 불량교우와 어울려 망가질것은 염려한 선생님의 사랑의 매였다. 겨울방학 중 합격증을 받으러간 날 선생님이 계셨는데 날 보더니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너털 웃음을 웃으셨다.
나는 나의 자녀들에게 훌륭하고 귀감이 되는 어른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나는 어른스럽지 못하면서, 나는 바르게 행동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에게만 정직하게 살아라, 열심히 공부해라, 훌륭한 인물이 되라라고 강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른인 나부터 변해야 세상이 변하고 나라가 건강해진다. 물질 앞에선 도덕이고 양심이고 필요 없다는 인간성이 파괴된 황금만능주의의 세상,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고 외려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죄를 가리려는 썪어빠진 세상을 어른 들이 조장하는데 배우는 어린이들과 청소년이 따라하는 것을 뭐라할 수 있을까. 비정상이 정상인 것처럼, 거짓이 참인 것처럼 간주되는 비양심과 뻔뻔함이 판치는 어른 들이 사회지도층에 있는 한 나라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그 옛날 선생님께서 내게 싸대기를 날렸던 것처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차리라는 국민들의 불꽃 싸대기가 아닐까. 마음이 텁텁해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