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에세이
[에세이] 누름돌
한결
아침부터 왠 비가 이리도 많이 내리는지 날도 을씨년 스럽고 꿉꿉한 것이 영 기운이 나질 않는다. 마치 여름비 처럼 강하게 내리는 비를 보노라니 여름비는 더위를 식혀주느라 청량하기나 하지 오늘 같은 가을비는 가뜩이나 썰렁한 날을 더욱 초췌하게 만든다. 매 주 일요일마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외출시키는데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나도 집에서 꼼짝도 하기 싫다. 행여 잦아들까하고 몇 번을 밖에 나가 보았으나 이놈의 빗줄기는 수그러들기는 커녕 오히려 기세등등하여 여름 소나기처럼 드세지기만 한다. 약해지지도 않고 더 강해지지도 않는 일정하게 퍼붓는 것이 달구비다. 그나마 바람 까지 동반한 소용돌이비가 아닌 것을 감사해야할 지경, 아침부터 신경이 곤두선다. 어머니 병원에 가자니 귀찮고 안가자니 기다리고 계실 어머니 생각에 가야할 것같고 괜히 애꿎은 하늘을 원망한다.
'아니 좀 그치지, 이렇게 계속 내리면 어쩌란 거야'
하늘을 보니 희뿌연 장막이 드리운 것이 것이 당장 기세를 멈출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계속 쏟아질것 같은데 안간다고 하면 실망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가자고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한다. 내내 병실에서만 지내시다가 일주일에 딱 한 번 외출하는데 그것마저 없으면 어머니도 숨 쉴 구멍이 없을 것이다.
날씨를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도 없으니 난감하지만 하기로 했으면 억지로라도 실행에 옮겨야하지만 찝찝함을 떨칠 수는 없다. 한참을 혼자 실랑이를 하다 운동화 대신 슬리퍼로 신고 긴바지 대신 반바지를 착용한다. 비오는 날은 영 성가신게 아니다. 하기싫은 일을 해야하는 것이 내가 할 일임을 알면서도 수시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런 날, 꼭 외출을 하셔야 하는지 악보의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궁시렁거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 빈집도 아닌데 비가 내려 그런지 아버지 댁도 적막하기만 하다. 사람사는 냄새란 꼭 대가족은 아니더라도 어른 아이가 함께 모여살아서 시끌벅적해지는 않아도 인기척 소리가 빈번해야 하는게 맞을 터인데 아버지 혼자 있는 집은 아파트 1층 작은 평수 인데도 마냥 넓어만 보인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TV가요프로그램을 틀자 집 안에 활기가 돋는다. 쌀쌀한 거실 공기가 사람들로 인해 뎁혀지고 아버지도 좋으신지 옅은 웃음을 보이신다. 따스함을 더하기 위해 따뜻한 커피와 라떼를 사러 밖으로 나간다. 한 잔은 함께 온 내 둘째 아이를 위해, 또 한잔은 감기들까 걱정되는 어머니를 위해 준비하고 아마 비로 인해 스산해진 마음을 데워줄 것이다.
아버지께서 이 번 연휴 때 고향을 가보고 싶다고 하신다. 마지막 방문이 될 듯하다는 말에 괜시리 마음이 먹먹해진다. 사실 고향에 가봐야 볼 것도 없다. 논도 밭도 산도 부모님 치료비를 위해 모두 팔았고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집마저 남의 집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나의 케렌시아였던 고향을 잃어버리기 싫어 은퇴 후 가끔 찾아가 옛날을 추억하려고 마련해둔 손바닥만한 땅뙈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몇년 전 고향집을 찾았을 때는 집을 산 사람이 건물을 모두 허물고 싹 밀어 잡초만 무성했을 뿐 집의 형태는 흔적도 없었다. 그 옛날 어머니가 돼지를 키울 때 쓰던 녹슬고 구멍난 무쇠 솥 하나와 김장독의 김치를 누를 때 썼던 누름 돌 한 개만 덩그러니 놓여 낮이 익었다. 아마 아버지께서 허리 수술을 위해 지금살고 있는 곳으로 오시기전 온갖 잡동사니들을 모두 광에 넣어놨는데 집을 산 새 주인이 허물면서 남은 잔해들인듯 했다. 누름돌은 넓적한 타원형의 아주 예쁜 돌이었는데 냇가에 멱을 감으러 갔다가 주워 온 돌이었다. 누름돌이 혼자 버려져 있는 것을보고 얼마나 마음이 휑하던지 없어진 집, 마치 나의 어린시설이 없어진 듯 끝없는 상실감이 나를 내리 눌렀다.
부모님도 고향을 등지고 싶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끝까지 버티고 버티다 몸 이곳 저곳이 아프고 시골의 부족한 의료체계 때문에 큰 병원이 있는 대도시에서 살고 있는 아들집 가까운 곳으로 이사왔을 터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 혼자 살고 계신 아버지, 조금이라도 거리가 있으면 자녀의 도움 없이 갈 수 없이 쇠약해진 부모님을 보면서 나라도 고향에 마련해 놓은 조그만 땅을 지켜 후세에 남겨야하지 않을까. 장성한 아이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알고 그들도 나이가 들어 할아버지와 아빠의 고향에서 쉬어갈 수 있도록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대대로 지키는 버려지지지 않는 누름돌같은 쉼터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