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 에세이
[에세이] 봄비 지나간 자리
한결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생각하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봄비가 내린다. 역시 자연의 이치는 어긋남이 없다. 계절은 어김없이 자신이 가고 올 때를 아니까 말이다. 봄비를 맞는 나무가 한층 푸르러진다. 봄비는 다정한 손길로 겨우내 꽁꽁얼었던 대지의 차가움을 녹여내고 나무들, 풀잎 하나하나까지 어루만지며 묵은 때를 벗겨내고있다.
출장 중 따뜻한 봄햇살과 향기로운 벚꽃의 향연을 기대했지만 비가 오겠다고 하니 막을 수 없었다. 거리엔 한껏 피어나던 벚꽃잎이 수북이 쌓여있다. 그러나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비가 그치고 나면 새로운 꽃은 끊임없이 새로 태어날 것이다.
일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중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잔을 포장해 차에 오른다. 차창에 부딪혀 미끄러지는 빗방울을 가만히 바라보며 봄비의 으슬함을 녹여낸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이 비를 맞아서 한층 더 푸르게 보이고 제법 운치가 있다. 초록이 절정에 달할 때라는 것을 아는 듯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맞으려 살아있는 생명들 뿐 아니라 회색 건물들까지 일제히 하늘을 향해 비를 우러르고 있다. 싱그럽고 생동감 넘치는 광경이다.
봄비를 피하는 것은 한 방울이라도 맞을 세라 우산 손잡이를 꼭 쥐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는 사람 들 뿐이다. 봄비는 의외로 차갑다. 거세게 내리지는 않지만 몸에 닿는 한 방울에 깜짝 놀랄 수도 있다. 비가오면 아무래도 기온이 내려가기에 쌀쌀해지기도 하니 개인적으로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그러나 봄비가 온 후에는 세상이 완연하게 달라질 것이다. 비가 내린 후에 만들어 낸 풍경은 그 자체가 생동감이며 비가 그친 뒤 맞이하는 하늘과 햇볕은 봄을 색칠하는 수채화 물감처럼 싱그럽다. 아마도 봄비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겨울 뒤의 새로움이기도 하고 만물이 다시 태어나는 신선함이기도 하며 세상 모든 것을 위한 사랑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내게 봄비같은 사람이 있었을까. 또 난 누군가에게 봄비같은 사람이었을까. 자신을 내보이기 좋아하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 권리를 찾지 못한다고 목소리가 커지는 세상, 조금도 손해도 보지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각박함 속에서 마음이 겨울을 버티고 있을 때 소리없이 다가와 말없이 손을 내밀어주는 봄비같은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닐것이다.
수없는 시간이 흘렀지만 봄비는 여전히 제자리다.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방울의 감촉을 느낀다. 손가락과 손등을 타고 어느 해의 추억 들이 스며들고 어느 해의 기억은 사라진다. 봄비 지나간 자리엔 무엇이 남아 있을 까. 신발 끝으로 스며드는 차가움을 커피 한 모금으로 녹여내는 사이 비는 그치고 내 마음은 여전히 어느 그 해의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