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을러지고 싶어 9
결혼 후에도 남편과 나는 주말 부부였다.
남편이 미분양 아파트를 신청해 우리 둘의 급여로 납부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결혼 후에도 각자의 집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직장과 집 사이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때 나는 시댁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먼저 말했다.
나 혼자의 선택이었다.
늘 둘째로 살아왔던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유일한 딸 같은 며느리’가 되었다.
모든 사랑이 나에게 향했다.
그게 좋았다.
사랑을 독차지하는 기분,
누군가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따뜻함이 좋았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 오늘 볶음밥 해드릴게요.” 하며 부엌에 섰다.
하지만 그때 내가 만든 볶음밥은 밥보다 기름이 더 많았다.
지금의 나라면 한 입도 못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뇨가 있던 시아버지는
그 밥을 한 숟가락 남김없이 다 드셨다.
과묵하시던 분이었지만,
그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 시절엔 세상이 흉흉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길,
누군가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멎을 듯했다.
시집오기 전까지는
엄마가 늘 골목 입구에서 기다려 함께 귀가했다.
겁이 많았던 나는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시집와서도
시아버지가 매일같이 골목 입구로 나와 계셨다.
내가 버스에서 내리면,
보일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앞서 걸어가며
집까지 함께 들어오셨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 보호와 사랑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심한 위경련으로 끙끙 앓고 있을 때였다.
시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병원 응급실로 나를 데려가라고 하셨고,
직접 돈을 건네셨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이 집의 며느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딸로 받아들여졌다는 걸.
입덧도 심했고, 첫 아이를 낳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 시기,
시아버지가 손수 가물치를 사 오셨다.
기름기 하나 없이 맑게 고아서
따뜻한 국물과 함께 내게 건네셨다.
엄마가 해준 흑염소도, 시어머니가 끓여주신 장어탕도
비린내가 싫어 먹지 못했는데
그 가물치는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만큼 정성이 느껴졌다.
나는 친정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목욕시켜 드렸고,
시아버지의 임종 전 웃는 얼굴도 내가 보았다.
두 아버지 모두,
말보다 행동으로 사랑을 남기고 가셨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시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과묵했지만, 누구보다 큰 사랑을 주신 분이었다.
그 사랑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의 나는,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가장 깊은 사랑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