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을러지고 싶어 11
딸을 낳고, 우리가 중도금을 내던 아파트에 입주했다.
아들이 일곱 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니던 때였다.
아침마다 아이를 태워 보내고
함께 있던 엄마들과 차를 마시며 인사를 나누는 시간들.
그 시절에도 나는 여전히
내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 배우는 엄마였다.
남편이 일찍부터 자가를 마련했지만
그건 가진 것 이상을 끌어모은 대출로 시작한 집이었다.
지역을 옮길 때마다 남편은 늘 자가를 구입했고,
그때마다 또다시 대출이 시작됐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결혼 후 지금까지
늘 대출을 갚아가는 상태였다.
월급의 대부분은 원리금 상환으로 빠져나가고,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을 전전하며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내 손으로 채워주려 했다.
책을 사고 싶었지만 남편은 늘 말렸다.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일주일에 다섯 곳의 도서관을 다니며
한 번에 쉰 권씩 책을 빌려왔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책을 너무 좋아했다.
밤마다 무한대로 책을 읽어 주었고,
거실에는 책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둘째는 네 살 무렵,
새벽어둠 속 거실에서 영어책을 넘기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알았다.
아이들은 스스로 배우고 자라는 존재라는 걸.
부산에서 함께하던 친구 엄마들과
그 당시 유행하던 ‘푸름이 교육법’으로 아이를 키웠다.
네댓 명의 엄마들과 열 명의 아이들이
생태체험, 책 만들기, 박물관, 도서관 수업 등
아이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함께했다.
그러다 남편이 옮긴 회사에서 목포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일주일에 하루 쉬는데
부산까지 왕복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했다.
“아이들과 목포로 와줘. 이제 우리 같이 살자.”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결혼 후 늘 떨어져 살던 시간이 길었기에
그 한마디가 나를 움직였다.
부산을 떠난다는 건 내게 큰 용기가 필요했다.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나는 ‘푸름이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목포로 이사 가는 부산댁입니다. 도와주세요.”
그 글에 한 명의 댓글이 달렸다.
그 사람은 목포대 교수의 아내였다.
우리는 그렇게 절친이 되었다.
아이들이 하교하면 갯벌과 바다, 자연생태관으로 달려갔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 동안엔
함께 영어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은 가족이 처음으로 함께한 시간이었다.
매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면
사서 선생님이 새로 들어온 영어책과 삼국지 만화를
살짝 내밀며 “이건 OO엄마가 먼저 봐요” 하셨다.
덕분에 아이들은 학교 대회마다 상을 받아왔고,
큰아이는 영재원에, 둘째는 원어민 발음으로 영어를 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뽀개기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전국의 산을 정복하기.
60이 넘은 시어머니도 함께했다.
치악산을 오르던 날엔 다리에 몸살이 나서
며칠을 쉬셨지만 끝까지 웃으셨다.
여름엔 캠핑, 바다, 계곡에서 곤충과 식물을 채집했고
그것들을 말려 도감으로 만들었다.
솔방울과 나뭇가지를 모아
작품처럼 꾸며 전시하기도 했다.
그다음엔 가족 화가 프로젝트.
이젤을 들고 휴양림을 다니며
각자 눈에 보이는 풍경을 4절지에 그렸다.
남편은 인생 처음으로 붓을 들었다.
“물감이 없어서 그림을 못 그려봤다”는 말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남편의 그림은 정말 멋졌다.
우리 가족의 그림은 지금도 화첩으로 남아 있다.
아이들이 도서관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사서분은 내게 어른 강좌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그 시간을 시작으로
나는 종이접기, 클레이아트, 한지공예, 냅킨아트,
그리고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증까지 땄다.
모두 아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배운 것들이다.
그즈음 우린 천안으로 이사했다.
서울에 살고 싶다는 내 꿈에
남편은 “여긴 중간이야”라고 말했다.
생면부지의 땅에서 두 달 동안 우울했지만
다시 도서관을 찾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자격증으로
학교 평생교육 강사 일자리에 지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면접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사회로 나왔다.
아침엔 벨리댄스, 낮엔 강의,
아이들이 돌아오면 함께 책을 읽고,
주말엔 도서관에서 공부와 놀이를 했다.
아이들과 함께 지역아동센터에서 오카리나 봉사를 하며
1년 만에 합주를 만들어냈다.
센터장님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 시절의 우리 가족은,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