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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공간을 회복하다

by 오늘사 Mar 21. 2025
저장강박증 의심 가구 주거환경 개선 진행 사례(사진출처=금천구청)저장강박증 의심 가구 주거환경 개선 진행 사례(사진출처=금천구청)


LH 관리사무소에서 요청이 들어왔다. 저장강박증을 앓고 있는 한 주민이 있었는데 그의 집이 너무나 혼잡해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고 그로 인해 이웃들과 갈등이 생길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무겁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분의 어려움을 해결할 기회가 생긴 것 같아 의욕도 생겼다.


그렇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문제의 심각함이 더 명확히 드러났다. 저장강박증을 갖고 있는 당사자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집 안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고 벽을 따라 쌓인 박스와 책들, 바닥을 덮고 있는 각종 쓰레기들, 의자와 테이블 위에도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방을 지나가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처음엔 이 작업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얼마나 힘든 일이 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당사자의 삶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당사자분과 대면했다.


처음에는 나를 의심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사람도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분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꺼냈다. 


"○○님 저희가 여기 온 이유는 오직 ○○님을 돕기 위해서예요. 조금씩 정리해 나가면 집도, 마음도 편해질 거예요. 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천천히 같이 해봐요." 


그 말을 들은 ○○님은 잠시 멈칫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을 보고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우리는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작은 부분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님은 물건 하나하나를 들고 나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내 어머니가 주신 거예요." "이건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책인데…" 그분의 목소리에는 애틋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가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기억과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그 물건들이 단순한 '쓰레기'나 '불필요한 물건'이 아니라 ○○님의 삶의 일부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이 물건은 정말 필요하신가요? 버리시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실 거예요." 그런 말을 건넸을 때, ○○님은 한숨을 쉬며 잠시 생각에 잠기곤 했다. 정리 작업이 진행될수록 ○○님은 조금씩 변해갔다. 처음에는 물건 하나하나를 버리는 것이 불안하고 두려워했지만 점차적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한 번에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님이 '이 물건을 버려도 될지' 고민할 때마다 나는 기다려주었고 그가 결정을 내리도록 도왔다. 그런 과정 속에서 ○○님의 표정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불안감이 사라지고 그가 점점 더 편안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몇 시간이 흐르고 집 안은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는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고 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물건들은 정리되었고 쓰레기도 대거 치워졌다. 마지막으로 큰 쓰레기봉투를 밀어 넣으면서 ○○님이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깨끗해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도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님은 그동안 나와 대화도 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분의 손을 잡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님의 마음이 정리된 것 같았다. 그분이 감사의 말을 전할 때 나는 진심으로 그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내가 맡은 일은 단순히 한 사람의 집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을 함께 나누며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돌아보게 된다. 인간관계가 주는 힘, 그리고 작은 도움으로도 세상에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다시금 느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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