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대학교에 소재하는 박물관을 방문하는 경우가 있다. 대학부설이다 보니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문을 열지 않아서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서울대 규장각이야 워낙 유명하고 고려대학교 박물관, 동국대박물관 등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보물급 유물들이 의외로 여러 점을 소장되어 있다. 낭만적인 대학 분위기에, 정말로 (관람객이 없어) 조용하고도 속상한 박물관에서 나 홀로 유물을 독차지하는 기분은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비밀이다.
경북대학교 대구캠퍼스에 위치한 박물관은 도심에서 가깝고 교내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찾기도 쉽다. 대학 박물관 치고는 유물량이 많아 국립대구박물관이 국보 4점, 보물 13점을 보유한 것에 비해 이곳에는 보물 7점을 포함해 7천여 점의 수집품과 4만여 점의 발굴품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바라본 경북대학교 본관, ⓒ 전영식
경북대학교 박물관
고색창연한 박물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월파원'(月坡園, 달의 계수나무 언덕)으로 이름 붙인 야외 정원 겸 전시장이 있다. 대구, 경북 여기저기서 수집한 비석, 문인비와 석등, 목이 잘려나간 석불들이 국립경주박물관처럼 배치되어 있다. 특히 경북대 박물관의 야외전시장은 가마터, 고인돌, 무덤도 이전해서 보존하고 있다.
지질학의 시각으로 유물을 보는 필자에게 야외 전시장은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보물 같은 석조 문화유산이 잔뜩 있는데, 특히 '대구 석빙고비'(1713~1716)는 단연 눈에 띄었다. 자색 셰일을 바탕으로 작은 자갈이 박혀 있는 역암으로 만든 비석인데, 보존 상태가 좋아 수려한 글자체가 잘 보인다. 옆면을 보면 역암 특유의 사층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역암은 포함된 자갈이 떨어져 나오기 쉽기 때문에 글자를 세기는 비석으로는 기피되는 암종이다. 하지만 이 석빙고비는 표면도 부드럽게 잘 마석되어 있어서 이물질도 없고 3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마치 어제 만들어진 것만큼 상태가 좋다. 역암의 용도를 다시 보게 하는 유물이다.
대구 석빙고비, ⓒ 전영식
이 밖에도 야외 전시장에는 오늘의 주인공인 2개의 멋진 승탑이 있다. 승탑은 고승의 사리를 안치한 탑이다. 부도라고도 하고 묘탑이라고도 불린다. 이 승탑의 이름에는 산격동이라는 지명이 들어가 있는데, 석조 문화유산의 명명법에서 발견지 또는 소재지를 명시하기 때문이다. 승탑은 사찰에 있는 것이 정상인데, 이 탑은 대구 시내 한가운데 있었고, 절 이름도 아닌 산격동이란 이야기는 유물이 원래 있던 곳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이름에서 지칭하는 산격동은 일제강점기에 '오구라 다케노스케'라는 사람의 대구 산격동 집이다.
대구 산격동 연화 운룡장식 승탑(좌), 대구 산격동 사자 주악장식 승탑(우) , (모두 보물), ⓒ 전영식
오구라 다케노스케
오구라 다케노스케, 출처: 중앙일보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는 대구에서 부동산 투기와 전기사업으로 떼돈을 벌었는데, 이 돈으로 1920년대부터 우리 문화유산을 매집했다. 구입한 것도 있지만 도굴을 사주하였는데 특히 가야 유물을 적극 사 모았다. 장르와 출처를 따지지도 않은 묻지 마 구입의 규모가 너무 커서 전체 수량이 확인되지 않는데, 1,100점 이상을 해방되기 10여 년 전부터 일본으로 반출했고, 반출하지 못한 문화재가 4,000여 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총 구입금액은 간송 전형필선생보다 10배가 많은 2,000만 엔에 달했다고 한다. 더욱 큰 문제는 어디에서 나온 유물인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돈 될만한 물건에만 눈이 멀어서 원래 발견장소에 대한 기록도 없이 끌어모아서 엉망진창을 만들었다. 이래서는 유물의 고증과 역사 복원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해방이 되자 오구라는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미처 반출하지 못한 문화재는 '적산문화재'로 우리나라에 귀속될 처지였다. 이에 눈물을 머금고 대구시에 트럭 7대분에 해당하는 700~800점을 기증했다. 하지만 다 돌려줄 생각은 절대 없어서 상당수의 유물은 대구 저택(700평, 현재 동문동 38-10 일대) 마루 밑과 천장에 숨기고 귀국했고, 200여 점은 심복에게 맡겨 놓고 '10년 후에 다시 올 테니 잘 보관하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물론 이 물건들은 훗날에 들통이 나게 된다. 경북대 박물관에 있는 위 두 승탑과 실내의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패망시기에 오구라가 미쳐 일본으로 빼가지 못한 유물 중 3점인 것이다.
1954년 반출 문화재를 관리할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설립했고, 1964년 그가 죽은 후 1981년 도쿄국립박물관에 1,030점이 기증됐다. 현재 그 유물은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 5층 한국실에 오쿠라 컬렉션(Ogura Collection)이라는 이름을 달고 전시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컬랙션 중에는 일본 국가문화재가 39점이나 지정될 정도로 가치가 높다. 한국정부와 민간단체 등은 이 유물의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은 민간소장품이라는 핑계로 반환에 응하지 않고 있다.
간송 전형필 선생
간송 전형필, 출처: 우리 역사넷
같은 시기 우리나라에는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대척점에 있던 분이 계셨는데, 바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선생이다. 원래 부잣집에서 태어났는데 작은 아버지 댁으로 양자를 가는 바람에 훗날 양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억만장자가 됐다. 효제초등학교, 휘문고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일세." (오세창이 전형필에게)
화가 고희동을 통한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과의 인연은 간송에게 문화재를 보는 눈을 뜨게 했으며, 일본인에게 흘러가 사라질 위기에 놓인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사재를 털어 유출되는 문화재를 구입하도록 했다. 결국 1938년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을 세웠고, 오세창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으로 '보화각(葆華閣)'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그는 후에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1940년 동성학원을 세워 1905년에 왕실에서 세운 보성중학을 인수했는데 그 학교가 현재의 보성중고등학교이다. 참고로 1905년에 함께 설립된 보성전문학교는 1910년 천도교에 인수되었다가 1932년에 고려중앙학원에 인수되어 오늘날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간송의 보유 문화재는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보존, 전시되고 있는데, 1971년부터 봄, 가을 한 달만 오픈하여 공개되곤 했다. 인지도와 관심이 늘어남에 따라 협소한 장소에 밀려드는 관객 때문에 건물과 시설에 큰 부담을 주게 되었다. 가끔 DDP에서 잠시 외유 전시를 하기도 했다. 이에 간송미술관은 2016년 대구시와 '대구간송미술관 건립·운영에 대한 계약'을 체결한 후 총사업비 446억 원을 들여 2022년 2월 착공해 2024년 4월에 준공했다.
대구간송미술관 홈페이지
대덕산 아래 오픈한 간송박물관 대구 분원은 3~4개 전시실에서 상설전시로 운영되고 나머지 2~3개의 전시실이 특별전으로 할애된다. 우리나라 문화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지자체와 사립미술관의 콜라보가 더욱 큰 영향을 끼치길 기대한다. 오구라가 우리 문화재를 매집한 지 10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 대구라는 한 공간에서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흔적과 간송 전형필의 큰 업적을 함께 만나는 것은 격동의 세월과 우리 문화재 보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이면 선생님의 인솔로 비공개된 보화각을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당시 어린 마음에도 귀중한 유물을 조심스럽게 감상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보화각의 고풍스러움에 자부심도 느꼈다. 한편으로는 솔직히 입시 위주의 교육 시스템에서 이런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조바심도 느꼈다. 하지만 이제 전국의 문화유산을 스스로 찾아다니는 연륜과 나이가 되어 돌아보니, 그 당시 그 한적한 보화각을 황제 관람 할 수 있었다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 황홀하던 젊은 시절이 그리워진다.
참고문헌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해외소재문화재조사서제12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일제강점기, 한국문화재 털어간 '큰 창고(오쿠라) 작은 창고(오구라)', 경향신문, 2020.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