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과학 이야기, 영화 속 과학 이야기
일본 애니메이션의 명가, 스튜디오 지브리는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여 애니메이션을 여럿 만들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이 1994년 발표된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平成狸合戦ぽんぽこ, Pom Poko>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주인공은 너구리이고 작전의 대상은 인간이다.
원래 도쿄 인근 타마산에는 너구리 요괴 바케다누키(化け狸, 둔갑너구리)들이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너구리들은 사람들의 시골 마을이 근처에서 살기는 하지만, 불필요하게 사람들과의 접촉은 피하면서 고작해야 자연에서 자라는 식물과 밭의 작물들을 조금씩 훔쳐먹으면서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버블시대에 들어서면서 1967년부터 타마산이 뉴타운계획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자연뿐 아니라 너구리들의 마을도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점점 쫓겨 들어가던 너구리들은 서로 간에 갈등이 심해지고 사회는 각박해지고 위기로 치닫는다. 이에 "이대로 가다간 모두 다 죽는다"는 현명한 오로쿠 할멈의 중재로 정신을 차리고, 모든 너구리들이 살아남기 위해 뜻을 모은다. 하지만 방법에는 이견이 따르는 법이라 강경파는 인간을 공격하는데 결과가 시원치 않자, 이 애니메이션의 백미인 '요괴대작전(백귀야행)'을 벌인다.
하지만 놀이공원 원더랜드 사장의 사기행각에 자신들의 행위는 묻히고, 일부 너구리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지만 그런 땅은 이미 어디에도 없다. 결국 인간들이 만들어준 좁디좁은 자연공원에서 소수의 너구리는 예전처럼 살고, 변신술이 가능한 너구리들은 인간으로 둔갑하여 도시에서 인간과 섞여 살아가게 된다. 어쩐지 너구리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싶었다.
너구리(Common racoon dog)는 갯과에 속하는 포유류이다. 몸길이는 45~71cm, 꼬리길이는 12~18cm이다. 몸무게는 봄에는 3kg, 여름에는 6~7kg으로 계절에 따라 변한다. 개로 따지면 소형견 범주에 들어간다. 오소리와 비슷한데 너구리는 귀가 뾰족한 반면, 오소리는 귀의 위치가 낮고 쳐져있어 구별할 수 있다. 볼이 통통해지면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 된다. 너구리는 잡식성이고 갯과 중에 유일하게 동면을 한다.
임신기간은 61~70일이며 보통 4~5월에 6~8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폼포코...>에서는 999살 먹은 장로도 나오지만 정확한 수명은 알려져 있지 않고 사육하면 11년 정도 산다고 한다. 서식지는 본래 동아시아, 러시아극동, 인도차이나반도이다. 소련 시절 모피(고급 모피는 아니다)를 얻기 위해 유럽으로 가져간 러시아 너구리가 유럽에 퍼져 폴란드, 독일에는 생태계와 농업에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다고 한다. 주요 천적은 늑대인데, 늑대가 없으니 번창한다.
요즘은 서울이나 경기도 곳곳에서 너구리가 출몰한다. 하천변에 산책길에서 너구리를 한두 번은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개체수가 많이 증가했다. 이제는 먹이를 구하기 쉬운 아파트 단지에도 나타난다. 소방청에 따르면 2024년 전국의 너구리 포획건수는 1445건으로 전년(732건)에 비해 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귀여운 모습에 호기심으로 다가갈 수도 있지만, 번식기(3~9월)에는 공격성이 있기 때문에 특히 조심해야 한다. 갯과이기 때문에 물리면 아프기도 하겠지만 치사율 100%인 광견병에 걸릴 수도 있고, 진드기를 통해 '중증 열성 혈소판 감소 증후군(SFTS)'이나 개선충(옴)에 감염되어 가려움증이 생길 수 있다. 애완견이 공격당한 사례도 많다.
사실 요즘 젊은이들은 소나 말, 돼지의 실물을 본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마트에 가면 정육코너에 있는 부위별로 나눠진 고기가 어떤 동물인지 모른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동물원을 자주 가는 문화도 아니고, 동물원이 주는 음울한 분위기에 오히려 동물과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너구리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농심에서 판매하는 '너구리'라면 일지도 모른다. 이 라면은 우동+라면의 컨셉을 가진 제품으로 1982년 11월에 출시된 장수제품이다. 여기서의 우동은 타누키(タヌキ)우동을 말하며 타누키는 일본어로 너구리다*. 그래서 제품명이 너구리가 됐다. 신라면 보다 먼저 나왔으며 건더기 스프가 별도로 들어간 고급면의 시초였다. 전남 완도 금일도 산 다시마도 들어간다. 하지만 서구 수출용에는 다시마가 없는데, 해조류를 먹지 않는 그들의 식습관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서양인에게는 해조류를 분해하는 효소가 없다고 한다.
* 롯데월드의 마스코드 '로티'와 '로리'도 너구리를 본떠 만든 것이다.
요즘은 컵라면, 볶음면, 크림면 그리고 매운 앵그리 라면(일명 RtA)이 나와 종류가 다양해졌다. 영화 <기생충>에서 짜파게티와 함께 조리한 '짜파구리'로 유명세를 치렀다. 1991년 포르투갈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이 결성됐는데, 단일팀이 탄 비행기에서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야식으로 너구리를 먹자고 했다고 한다. 당연히 우리 선수들은 신이 났지만, 북쪽 선수는 "야밤에 너구리를 어떻게 잡아먹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은 잘 먹었다는 후문이다.
너구리는 원래 하천에 접한 낮은 산에서 서식한다. 도시에 수목이 울창해지니 숨기도 쉽고 길고양이 밥, 음식물 쓰레기 등 먹을 것도 많아 아파트 단지 같은 인간의 생활권에 자주 출몰하는 추세다. 너구리는 법률상 유해동물이 아니라 포획하거나 사살하는 것은 불법이다. 마주친다면 호기심을 보이지 말고 피해 가는 게 가장 좋다. 원래 그들이 살던 곳을 인간이 빼앗았는데, 다시 포획하고 쫓아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공존을 생각해 본다. 어쩌면 너구리 변신술도 보고 유령의 퍼레이드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