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유공자 자녀가 되었다.
부모를 잃자마자 된 것이 아니라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주어졌다.
사람들은 훗날 주어질 보상을 이야기하며 다행이라 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도 아니었고, 주어진 보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빠는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어서 부모님과의 기억이 없으셨다.
"아빠, 뭐 하고 놀았어?"
"일했어"
어려서부터 일을 해야 했던 아빠는 일밖에 모르신다.
유공자 자녀가 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빠 스스로 가장이 되어야 하는 삶이라 고된 어린 시절이라 이야기하신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의무교육 과정이었기에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는 아빠. 엄마 아빠가 있었다면 더 공부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아빠는 말씀하신다.
“공부하고 싶어도 못했다”
부모를 잃은 전몰유공자 가족들은 나라의 유공자 자격을 위해 오랜 시간 투쟁했다.
아무런 도움과 혜택도 없이 혹시라도 주어질 것들을 기대하며 말이다.
한 가지 아빠가 받은 건 군면제였다.
그렇게 아빠의 나이 40대가 훌쩍 넘어서야 유공자 카드를 받으셨다. 아빠는 유공자 자녀가 되었고 나는 유공자 손자녀가 되었다.
큰 변화가 있었을까?
전혀 없었다. 아빠가 유공자 자녀가 되었을 땐 이미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학을 들어갔을 떼 주어지는 혜택도 소용없었고, 직장의 우선 채용도 대학을 나오지 못해 소용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도움과 관심이 필요했을 아빠의 유년시절이 다 지나가 버렸다.
아빠는 유공자 자녀로 받을 수 있었던 혜택에 관심이 없으셨다.
너무 어린 나이에 떠나버려 얼굴도 모르는 아빠는 사진조차 없어서 아빠의 모습을 항상 알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자식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엄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은 지금도 상처라고 하신다.
아빠의 손을 잡아 주는 이가 없었기에 아빠는 언제 손을 잡아야 하는지 모르신다.
아빠의 손은 여전히 비어있다.
눈으로만 잡는 지금도, 아빠의 손을 잡을 용기가 선뜻 올라오지 않는다.
아빠의 손을 아무도 안 잡아줬듯이 나의 손도 아빠는 잡아주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