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이는 따뜻한 물을 욕조에 가득, 넘칠 듯 담아 온몸을 푹 담그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거기다 좋아하는 음악까지 딱 틀어놓고, 나에게 간식까지 대령시켜놓고 먹는 모습이 ‘한량’이 따로 없을 정도이다. 딸은 이렇게 매일 저녁 식사 후 30분 정도를 어떤 의식처럼 자신만의 목욕 시간을 갖는다. 그렇다고 혼자 오래 놔두면 지루해지기 십상이라 나도 함께 그 시간에 샤워를 한다. 항상 내가 먼저 샤워를 끝마치고 아이와 눈 마주침을 하며 때도 밀어주고 물을 얼굴에 튀기며 장난을 건다. 아이는 기분이 좋아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듯한 환한 빛의 미소를 짓고 생기있고 초롱초롱 한 눈빛으로 나의 눈을 계속 바라본다. 만약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에서 자신과 같지 않는 빛이 보인다면 금세 눈을 돌려버린다. 엄마의 입은 웃고 있어도 속으론 근심이 있거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딸아이는 기가 막히게 눈치를 채고 자신의 빛을 거둬버린다.
딸의 이런 민감성 때문에 나는 아이와 조금이라도 교감하기 위해 늘 아이와 코드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단 일 초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아이와 엇나가면 아이는 자기만의 동굴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딸이 태어나 분유를 먹이지 않고 모유 수유를 할 수 있게 됐다. 임신 때부터 열심히 사다 읽어둔 육아책에는 모유 수유를 6개월 정도 하면 분명 엄마와 눈을 마주치고 생글생글 웃기도 한다고 써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아기는 표정도 뚱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내 눈을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발달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때에 맞춰 빠르면 빨랐지 느리게 시작되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기가 아이가 되고 보니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다는 게 조금씩 느껴졌다. 내가 하는 이야기도 다 듣고 있고 반응도 보이나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듯할 때가 많았다. 정기적으로 하는 영유아검진에서도 발달지연이라거나 특별한 소견이 없었기에 아이의 이런 특징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 것 같다.
자녀와의 깊은 교감은 보통 태어나서 영아 때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근데 지금 뒤돌아 생각해보면 나는 딸애와 눈빛으로 깊이 소통하는 것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것도 최근 몇 년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아이를 옆에서 열심히 돌보기는 했으나 제대로 소통할 줄 몰랐던 나의 육아 방식과 아이의 특성을 뒤늦게 깨달은 나의 불찰이 크지 않았나 싶다. 또 아이도 세상과 소통할 마음의 준비가 늦게 나오기도 한 것 같다.
아이와 오랜 시간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나누는 순간은 내게는 황금 같은 축복의 시간이다. 아이와 진정으로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소통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서로 아무 말이 없다. 그저 눈으로만 대화할 뿐이다. 이 세상에 나와 시율이만이 존재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시율이의 빛과 나의 빛이 만나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는 듯한 순간이라 감격과 희열감이 단 일 분도 안 되는 시간에 넘쳐흐른다. 이제라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느꼈다는 안도감에 가슴 뭉클함이 느껴진다. 저 너머 어딘가에 홀로 외롭게 있던 아이가 내게로 우리에게도 가까이 온 것 같다.
아이는 오랫동안 외롭고 혼자인 것만 같은 우울감 속에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의 말과 행동들, 시끄러운 소리, 온몸의 감각을 뒤섞어놓은 듯한 자극들이 아이를 괴롭혀 왔을 것이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던 딸아이의 분노와 행동들이 이런 불안과 고통 속에서 시작되었을 것인데 알기까지가 참 오래 걸렸다.
아이는 엄마인 내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자체에서 안도감을 갖는다. 엄마가 세상에 선을 그어주고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주니 아이도 편안해진다. 이걸 지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딸아이의 세계에, 아이만의 동굴 속에 내가 들어가 아이를 한 발짝씩 세상 밖으로 내딛게 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치료해야 한다는, 기필코 고치고 말겠다는 목적의식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우선인 게 뭔지 알게 되었다. 아이와 엄마가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 깊은 마음의 울림을 서로 나누고 소통하는 것이 아이를 세상 밖으로 안전하게 나올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기쁘고 감사한 맘으로 아이와의 교감 시간을 기대하게 되고 기다려지게 된다. 더불어 하루하루 아이와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아이는 더 밝아지고 건강해지고 있음에 행복함과 감사함에 절로 온화한 미소가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