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km, 5시간 걷기
전날, 너무 피곤했는데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결국 조금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아침 먹고 7시 30분쯤 출발했다.
초반에 숲길을 지나가는데 7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깜깜했고 가로등 하나 없어서 무서웠지만 앞뒤로 순례자들이 보이고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면서 걷다 보니 괜찮아졌다.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설 때만 해도 전혀 힘들지 않았는데 1시간 30분 정도 지나니 어깨가 짓눌리는 느낌이 들면서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이때 마침 어느 마을에 도착했고 쉴 수 있는 카페가 보여서 쉬었다 가야 되나 여러 번 고민했지만 아직 1시간 반 정도밖에 걷지 않았는데 여기서 쉬고 가면 나중에 더 힘들어지고 무너질 것 같아서 다음에 나오는 카페에서 쉬기로 결정하고 계속 걸어갔다.
평지는 그나마 걷겠는데 오르막이 나오면 너무 힘들어서 거북이처럼 느리게, 헉헉거리며 올라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가방을 벗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면서 걸었다.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걷다 보니 두 번째 마을에 다다랐고 바(Bar)가 보이자마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들어갔다.
목이 너무 말랐는데 주스로는 이 목마름이 해소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콜라는 마시기 싫었는데 갑자기 맥주 생각이 너무 났다.
한국에서는 마시지도 않는 맥주를 순례길 2일 차 만에 찾게 되었는데, 한국에서 맥주를 안 마셨던 이유는 일단 맛이 없어서였고 우연히 억지로 먹다 보면 머리도 조금 아파서 안 마셨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는 이끌림으로 첫 한 모금을 마시는데 전혀 쓴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힘들게 걷고 나서 마시는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벌컥벌컥 마시게 됐다.
지나가던, 오고 가며 본 낯익은 순례자들이 내가 맥주를 마시는 걸 보며 아침부터 맥주를 마신다고 놀려대기도 했지만 맥주를 마시고 행복하다는 감정을 처음 느끼는 순간이었다.
바(Bar)에 도착했을 때 어제 마지막 구간을 같이 걸었던 외국인 순례자가 있어서 잠깐 얘기 나누다가 그분은 먼저 출발하셨고 뒤이어 오늘 아침을 같이 먹던 한국인 부부가 오셔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쩌다 순례길을 오게 됐냐고 물어보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다가
"나중은 없을 것 같아서,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라고 말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날 뻔했다.
이 상황이 나도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겨우 눈물을 참고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었는데 내가 그만큼 이 길이 간절했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걸으니 발걸음이 가벼워졌지만 1시간도 안 돼서 다시 힘들어졌고 하필 오르막 길이라 느릿느릿하게 겨우 걸어갔다. 목이 너무 마른데 물이 얼마 안 남기도 했고 화장실도 걱정되어서 최대한 참으며 걸었고 너무 힘들면 가방을 내려놓고 잠깐 쉬다가 다시 걷다가 힘들면 또 쉬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 표지판을 보고 힘내서 걷고 있었는데 저 멀리 푸드 트럭이 보였다.
너무 반가워서 잠시 쉬어갈까 고민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동행들이 쉬고 있는 게 보여서 나도 쉬었다 가기로 했다.
푸드트럭에서 도장을 받을 수 있다길래 오렌지주스를 한잔 시켰는데 너무 목이 말랐던 건지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다 마셨다.
내가 한 번에 다 마시니 푸드 트럭 직원도, 같이 있던 동행들도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원래 한국에서는 음료를 잘 먹지 않는 편인데 이날은 안 먹던 맥주에, 주스 원샷까지.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나의 모습이었는데 이 길은 계속해서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숨에 주스를 다 마시고 나서 남은 거리는 동행들과 함께 걸었다.
동행들과 함께 있고 얘기를 하면서 걸어서 그런지 확실히 힘든 게 덜 했고 같이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의지되고 좋았다.
그렇게 1시 넘어서 오늘의 마을에 도착했고 알베르게 체크인하자마자 바로 슈퍼로 달려갔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슈퍼가 2시에 문 닫는다고 해서 부랴부랴 슈퍼로 가서 물과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사고 아이스크림도 사서 바로 먹었는데 오늘의 힘듦이 다 사라지는 달콤함이었다.
슈퍼 갔다 와서 다시 숙소로 돌아와 씻고 빨래하고 재정비 후 마을 구경을 하러 나갔다.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를 건널 때부터 이 마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마을 구경을 꼭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행들도 한 명씩 차례로 나왔고 냇가에 앉아 쉬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물에 발을 담가보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차가웠지만 오늘도 힘들었는데 재정비 후 햇살이 따스한 어느 오후, 평화로운 마을에서 여유롭게 동행들과 함께 쉬고 있으니 이게 뭐라고, 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한 순간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특별한 기억이 될 정도로 행복했다.
아직도 그 분위기, 그 여유로움이 기억이 나고 손에 꼽히는 장면들이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각자 자리를 떴고 나는 그냥 숙소 들어가기 아쉬워서 동네 한 바퀴 돌았는데 동네가 작아서 구경하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는 않았고 아기자기한 마을이 너무 이쁘고 좋았다.
이렇게 내가 스페인의 작은 마을을 구경하고 있는 있다니!
여전히 내가 이 길에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각자 개인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먹으려고 다시 만났는데 이날은 일요일이라 문 연 식당이 딱 한 군데밖에 없어서 선택지가 없었다 보니 모든 순례자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사람이 너무 많아 겨우 자리를 잡았고 식사 메뉴 대신 맥주 안주로 먹을 수 있는 것들만 팔고 있었는데 음식도 몇 개 안 남아있어서 약간 실망스러웠다.
어쩌다 보니 한국인 동행들과 다른 국적의 순례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게 됐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실망스러웠던 마음이 사라졌고 내가 이곳에서 이러고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고 신기했지만 영어로만 대화하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어서 약간 힘들었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많이 웃었고 재밌었다.
오늘도 걸을 때는 어깨도 아프고 발바닥도 아파서 ‘언제 도착하지?’ ‘너무 힘들다’ 이 생각만 하며 걸었는데 도착해서 씻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잔잔히 물이 흐르고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한적한 어느 마을에서 동행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마을 구경도 하며 여유로운 분위기와 그 순간을 즐겼다.
차츰 이 길에 적응되어야 할 텐데 여전히 걸으면서는 힘든 생각밖에 들지 않아 걱정되고 내가 여기 온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지만 빠른 시일 내에 적응되길 바라며 이 길을 걷고 싶었던 의미를 되새기고 즐기는 때가 오면 좋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당장 내일도 또 배낭을 메고 20km 정도를 걸어야 하는데 잘 걸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