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갈나무 이파리가 갈바람에 막 물들기 시작하는 노르스름한 빛깔, 참기름 냄새 솔솔 풍기는 찹차름한 밥, 각종 견과를 넣어 고소하고 달큼하게 씹히는 맛, 영양가 많아서 몸이 건강해지는, 먹는 자체로 약이 되는 밥, ‘약밥’이다.
찹쌀로 고두밥을 지어 갖가지 건과를 넣고 간을 한 후에 다시 쪄낸 약밥은 집안 행사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약밥 만들기 하루 전날부터 할머니 손길은 쉴 틈이 없었다. 찹쌀 씻어 불려 놓은 다음, 밤껍질 벗기랴, 호박씨 까랴, 대추 손질하여 졸이고, 곶감도 잘게 썰어놓아야 했다. 큰 함지박에 고두밥 찐 것을 퍼내어 식힌 후 손질한 재료를 넣고 나무 주걱으로 골고루 섞는 일도 만만찮았다. 달싹하고 참기름 냄새 솔솔 풍기는 약밥은 찰밥하고는 확연히 다른 음식이다.
약밥은 좋은 약재인 꿀을 넣어 만든 밥이어서 약반(藥飯), 갖가지 좋은 재료가 약이 된다고 하여 약식(藥食)이라고 했다. 향기로운 밥이라는 뜻에서 ‘향밥’, 아름다운 음식이라는 의미에서 ‘미찬’, 과일이 섞인 밥이라는 뜻에서 ‘잡과반’, 허균의 ‘도문대작’에는 중국인이 ‘고려반(高麗飯)’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약밥 유래가 나온다. 신라 제21대 비처왕(毗處王; 炤智王이라고도 한다)이 경주 남산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다.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 가는 곳을 찾아보시오.” 하여 왕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했다. 기사는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장면을 구경하다가 까마귀를 놓쳤다. 이때 한 늙은이가 못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겉봉에 “이 글을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왕은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다. 이때 일관(日官)이 한사코 말렸다. 왕이 일관의 말에 따라 봉투를 열어보니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고 적혀있었다. 왕은 곧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다. 왕은 못에서 나온 노옹의 도움으로 액을 면했다며, 그 못을 ‘편지 나온 못[書出池]’이라고 했다. 또한 정월 보름날을 ‘까마귀 날[烏忌日]’로 정하여 ‘까마귀밥’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찹쌀에 까마귀의 검은색을 물들여 만든 밥이 바로 약밥이라는 전설이다.
할머니는 사랑채 가마솥에 장작불 지피고, 채반에 면 보자기 깔아 약밥을 쪄내었다. 정성으로 만든 그 약밥은 먹을 수 없지만, 그 맛은 아련하게 남아있다. 요즘은 약밥을 떡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조금만 부지런 떨면 집에서도 간단히 만들어 냉동실에 보관해 두고 먹으면 된다.
찹쌀을 4시간 정도 불린 후, 찹쌀과 손질한 건과류, 진간장과 흑설탕을 식성에 맞춰 가감하여 압력솥에 안친다. 불린 찹쌀이라 물의 양은 밥할 때보다 적게 잡는다. 밥솥 추가 따그르르 몇 번 돌면 불을 끈다. 약밥은 질거나 퍼지면 맛이 없다. 밥알이 탱글탱글해야 제맛이 난다. 압력솥의 김을 뺀 후, 뚜껑 열어 곶감과 대추졸임, 참기름과 계핏가루를 넣어 섞는다. 색감이 너무 짙으면 거부감이 생기고, 옅으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적당한 색감, 입맛을 당기는 색감을 맞춰야 한다. 각종 견과류가 들어있어 맛과 영양이 풍부한 건강식, ‘약밥’ 완성이다.
Tip: 찹쌀, 대추, 계피는 성질이 따듯해서 차운 몸에 도움을 준다. 수정과를 곁들이면 금상첨화. 하지만, 따뜻한 성질의 음식을 뜨겁게 해서 먹으면 과도한 열이 쌓일 수 있으니,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은 약밥을 식혀서 먹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