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 건조기

큰 딸이 피아노를 가져간단다. 그리고 건조기를 선물했다.

by 따오기


큰딸이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결국 우리 집에 있던 피아노를 신혼집으로 가져간단다. 이사할 때마다 무겁고 자리까지 많이 차지하는 피아노를 짊어지고 다니느라 힘들었는데, 이제 피아노도 큰 딸처럼 시집보내게 생겼다.


큰 애는 오늘 카톡으로 가져가는 날을 공지하며 가족들 모두 피아노와 작별 인사하라고 알려 준다. 작은애도 함께 치던 피아노인데 작은애는 쿨 하게 '피아노야~ 안녕. 잘 가라'라고 심플하게 인사를 건넨다.


피아노 사랑은 큰애가 대단했다. 심지어 임신 막달에도 남산만 한 배를 하고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아기에게 음악태교를 했다. 어쩜 앞으로 손주 똘망이에게 피아노를 직접 가르칠지도 모르겠다. 누가 되든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피아노가 퉁퉁거리며 본연의 소리를 내었으면 좋겠다.


큰 애 일곱 살 때인가? 하도 피아노 타령을 해서 고민고민하다가 10개월 할부로 구입해서 어린이날 선물로 줬다. 그 당시 피아노 가격은 거의 삼백만 원쯤 됐던 것 같다. 생전처음 장기 할부로 물건을 구입했던 기억이다. 지금 시세로 환산하자면 천만 원은 족히 넘을 것 같다. 새 차 한 번 타보지 못한 우리 부부에겐 거금의 지출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집도 크지 않은데 저 큰 피아노를 이고 지고 사느라 우리 집 거실은 늘 비좁았다. 아이들 나이가 들면서 피아노를 예전만큼 치지 않아, 몇 번이나 팔자고 제안했는데 어찌나 반대를 하던지 팔지도 못했다. 대신 결혼하면 가져갈 테니 그때까지 가지고 있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다 지난겨울 분가 전 날 장식장 같던 피아노를 퉁퉁거려 온 가족 모두를 울린 기억도 있다.


이래저래 사연이 많은 피아노라 막상 보낸다니 시원하기도 하지만 우리 가족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그 당시는 피아노 학원 다니는 게 필수인 시대라 둘 다 한글을 떼자마자 피아노 학원부터 다녔다. 동네 음악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피아노 경연대회도 나가 상도 타오곤 했다. 초등학교 땐 모든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줄 착각을 하고 산다. 드라마에 나오는 의사 판사 변호사 화가 피아니스트만 직업인 줄 줄 알고 키운달까, 나도 두 아이가 피아노를 하도 열심히 쳐서 피아니스트가 되는 줄 알았다. 단, 늘 내가 일을 하고 있어서 엄마가 지원을 못해 미안하다고 음대 진학은 원천봉쇄하기도 했다. 문득 피아노를 떠올리니 여러 가지 추억들이 피아노 건반 위로 통통 거리며 피어나는 것 같다. 이러다 피아노 옮기는 날 눈물을 보이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참, 아직 배달은 되지 않았지만 큰애가 며칠 전 건조기를 주문했다고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다들 결혼하면 가족들한테 선물 하나씩 한다고 하길래 고민하다가 뒤늦은 결혼선물로 건조기를 보내요... 손편지 하나 없이 급하게 얼렁뚱땅 나온 우리 가족의 울타리에서 이제 나의 또 다른 가족이 생기게 됐는데,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시절 울 엄마, 아빠, 할머니 밤낮 바뀐 나를 키웠을 생각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 가늠이 조금씩 됩니다. 감사해요 엄마 아빠. 내 동생 세인아~~.'라고 적혀 있었다.


급하게 결혼하고 연달아 출산까지 하면서 얼마나 생각이 많았는지 구구절절 내용도 긴 편지를 써 보냈다.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한 번에 읽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쓰던 세닥기도 멀쩡한데 세탁기+건조기를 보내 뭐라고 하느라고 감동을 채 느끼지 못한 채 취소하라고 잔소리를 해댔다. 결론은 세탁기와 건조기 두 대를 취소하고 건조기만 받기로 했다. 큰 애는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집에 신경을 쓴다. 결혼할 때 보태준 것도 별로 없는데 우리까지 생각하다니 정말 놀랍고 고마웠다.


이제 피아노는 큰애네 집으로 가고 우리 집엔 건조기가 들어올 것 같다. 사실 몇 번이나 건조기를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평생 없이도 살았는데~'하고 말았는데 결국 큰 애가 살림 장만을 해 준다.


사실 이 소식은 건조기가 들어오는 날 적으려고 했는데 피아노 이야기하다가 저절로 건조기까지 연결하고 말았다. 이제 피아노 대신 건조기를 쓰며 큰 딸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건조된 빨래를 꺼낼 때마다 '니 덕에 뽀송뽀송한 게 삶에 질이 달라졌구나' 하며 추억하며 살아갈지도...


아직 가고 오지 않은 피아노와 건조기에게 미리 인사하는 밤이다.

'고맙다 내 딸아. 그리고 고맙다 우리 가족과 오랜 시간 함께한 오래된 피아노야.

막상 너까지 나가면 또 한차례 텅 빈 것 같이 허전할까 걱정이구나.

피아노와 건조기라는 물건 속에 큰 딸이 숨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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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파일럿이 그려 준 피아노와 건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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