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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마술사 '데런 브라운'의 다큐멘터리들을 본 적이 있다.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사람을 극단적으로 가스라이팅 해 살인을 행하게 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다큐멘터리다.
실험에 앞서 참가자를 선별하는 과정을 거친다.
참가자들 사이에 요원을 투입시켜 종이 울리면 일어섰다 앉는 행위를 한다.
참가자의 60% 정도는 요원을 따라 일어섰다 앉는 행위를 따라 했다.
데런 브라운은 이런 식으로 최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골라냈다.
그걸 보며 나는 저기에 당하지 않을 것이라 자만했다.
나는 유신론, 심리학, 한의학 등 믿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특히 심리학의 경우 최근 들어 추가된 불신 리스트인데 프로이트나 칼 융 대중서를 읽어 봤지만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임의 성격은 조금 변질되어 심리상담 시간이 되어 버렸는데
- 나와 어울리는 형용사를 고르세요.
- 나무를 그려보세요.
같은 테스트를 하고 내가 보완해야 될 점들을 충고하는 식이다.
형용사 고르기 테스트에서 '평온하다', '막막하다'를 골랐는데 심리상담가는 이 둘을 고른 게 이해하기 힘들다며 설명을 요청했다.
'칼 융 - 에난티오 드로미아 : 한쪽으로 쏠린 감정은 그 반대 감정도 발생시킴'
을 예를 들어 반박하려다 참았다.
심리학을 믿지 않는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고 그걸 업으로 삼는 상대에게도 예의가 아니다.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왔을 때 엄청 평온한데, 막상 '근데 이제 뭐 하지?'라는 생각이 들죠"
라는 설명으로 대체했다.
그림테스트 같은 건 아예 믿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흘려들었다.
그리고 본인이 주관하는 토론회에 대한 얘기도 했는데 여기선 귀가 트였다.
많을 땐 30명 까지도 모여서 '논어'같은 철학을 주제로 토론을 한다는 것이었는데 나에겐 딱 안성맞춤인 모임이었다.
모임장도 매우 관심이 간다며 우리도 그 모임에 참가할 수는 없냐며 매달렸다.
심리상담가는 한 번 물어보겠다는 투로, 확답은 아니지만 긍정의 메시지로 답했다.
심리상담가가 참여하고 물리학과 대학원생은 계속 불참을 했는데 대학원을 졸업하고 아버지의 일을 배우러 다니느라 당분간 참여가 힘들다는 이유다.
모임장은 아직 번호교환을 안 했었다며 내 번호를 요청했고 서로 교환했다.
물리학과 대학원생이 나에게 불참을 직접 설명하지 않았으니 1:1로 사과연락을 보내고 싶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카톡방도 합치기로 했다.
카톡방은 현재 물리학과, 수수한 여성, 모임장, 나 이렇게 4명이 참여 중이었는데,
모임장이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며 얘기하기 힘들다고 하여 심리상담가도 참여하게 되었다.
'이 방 저 방?, 다른 방이 더 있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물리학과 대학원생에게 1:1 카톡으로
"참여 못해서 죄송해요. 아버지 일 배우느라 계속 지방을 돌아다녀서... 시간 되면 꼭 다시 참가해 볼게요"
하는 연락이 왔다.
당분간은 3인체제가 지속될 것 같다.
단체톡에서 일정을 조율한 만남이긴 하지만 모임장과 둘만 만나 식사를 한 적도 있다.
앞으로 모임 활동으로 무엇이 좋을지.
조금 더 액티비티 한 것들을 하는 게 좋지는 않을지.
여러 얘기를 나눴다.
이때 나는 회사에서 준 상품권에 돈을 더 보태 산 타임옴므 브랜드의 고가코트를 입고 갔는데 딱히 눈여겨보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모임장과 개인톡도 하루이틀에 한 번씩 나눴다.
보통은 모임장이 먼저 개인톡을 보내고 내가 답장을 하는 식이었는데,
모임장으로써 책임감도 있겠지만 최소 나쁜 상황은 아니라고 확신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고 결국 토론회에 참여할 수 있음이 확인됐다.
나는 지식인들을 만나 토론을 한다는 기대와 공포가 동시에 들었다.
모임원들의 참여도 저조하고 애매해진 타이밍에 적절한 활동이 생겼다는 생각도 든다.
토론회 참가 전날 따로 식사를 한 번 가지기로 했다.
이 날 나는 코디에 도저히 안경이 어울리지 않아 안경을 벗고 갔다.
베이지색 폴로 랄프로렌 재킷을 입고 식사장소로 갔는데,
착장을 칭찬하며 내일도 이렇게 입고 와달라는 말도 들었다.
친누나가 자주 하는 말과 비슷해서 웃음이 나왔다.
누나는 본인이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날이면 "평소에도 좀 이렇게 입고 다녀"라며 경상도식 칭찬을 한다.
식사 후에도 카페에서 조금 더 대화를 나눴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모임장으로부터 놀라운 개인톡이 왔는데
"내일도 베이지색 입고 오기?"
란다.
나는
"넌 하늘색 입고 와"
라며 답장을 했는데,
나는 이걸 성적 농담으로 받아들일까 봐 잠시 골머리를 앓았다.
토론회 당일 아침엔 더 놀랐다.
모임장으로부터 "일어났어?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네"라는 개인톡이 와있었는데,
이건 분명한 호감신호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타이밍만 놓치지 않는다면 곧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오늘은 꽤 중요한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