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몫을 한다는 것
"어라? 이게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회사 근처를 산책하던 중 입구에서 발견한 벤치 두 개.
점심 식사 후 매일 회사 근처를 산책하기에 근처에 변화된 것들을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어제는 없었던 벤치들이 오늘 새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벤치. 공원이나 야외 산책길에서 흔히 발견되는 휴식용 의자이다.
크게 눈길을 끌 일이 없어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다.
다음날 같은 길을 산책하다가 다시 그 벤치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 벤치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 빨간색의 둥근 봉으로 된 철제 프레임이 둘레를 감싸고 있다. 얼핏 보니 예쁜 운동기구처럼 보인다.
'이 철제 구조물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혼자 되뇌며 다시금 걷는다. 벤치보다는 하늘을 보는 것이 산책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다시 그 길을 지나치려 할 때였다. '응?' 벤치가 빨간색의 화려한 우산을 쓰고 있다. 아니, 우산이라기보다는 마치 중세 시대의 멋진 귀족 마차 덮개 같은 느낌이다. 처음에 보았던 벤치 두 개는 어느덧 빨간색의 덮개를 한 멋진 안락 공간으로 변모해 있었다. 마치 나더러 '잠시 앉았다 가시라'라고 말하는 듯 붉은색 공간이 유난히 돋보여 보인다. 유혹을 이겨낼 힘이 없었던 나는 자연스레 이끌려 결국 그 벤치에 앉고야 말았다. 처음에 흔한 벤치로 치부하였던 구조물이 이제는 럭셔리 휴식 공간으로 변모해 있다.
긴장을 풀고 벤치에 등을 맡겼다. 생각보다 안락하다. 벤치에 앉아 멀리 경관을 바라본다.
붉은색 차양 위로 보이는 하늘이 더욱 푸르러 보인다. 나는 잠시 중세 시대 귀족의 신분으로 세상을 관조하고 있다. 화려한 외모에 현혹되어 '벤치 신세'를 진 나에게 자신의 진면목은 휴식 제공이라는 듯, 금세 나에게 나른함과 안락함을 동시에 전해준다. 아무리 외관이 다르게 변모한다 해도 벤치의 역할은 결국 '쉼'이리라.
세상에는 많은 '역할'이 존재한다. 심지어 사물조차도 그 존재에 맞는 역할이 있다.
땅속에 박혀있던 평범한 돌도 잘 다듬어진 후 석재로서 집이나 다른 건축물을 짓는데 그 역할을 다한다. 서양 예술의 흐름으로 익숙한 바로크, 고딕, 로코코라고 칭해지는, 5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어진 중세 시대의 화려한 건축사의 중심에는 '돌'들이 큰 역할을 해내었다.
식물은 또 어떤가? 길가에서 흔히 보는 풀, 꽃, 나무들... 종류와 용도를 몰라서 그렇지 전문가의 눈에는 모든 식물들이 다 역할이 있다고 한다. 약학서로 유명한 향약집성방(유효통 등, 1433, 조선), 본초강목(이시진, 1579, 명나라), 동의보감(허준, 1613, 조선) 등에서도 산풀이나 잡초는 사람을 생명을 구하는 약재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도 저마다 다양한 역할이 존재한다. 가정, 사회, 조직에 따라 맡은 역할은 천차만별이다. 국가에는 정부 조직으로서 직무에 따라 다양한 부, 처, 청, 위원회가 존재하고, 회사 내 조직은 역할에 따라 기획, 경영, 총무, 홍보 등으로 세분화된다. 이들의 역할과 그에 따른 헌신으로 우리 사회는 원활하게 돌아간다.
'제 역할을 다 한다'라는 개념을 영어로 'Pull one's weight.'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나의 하중(무게감)을 당긴다'라는 개념인데, 이 말의 어원은 1800년대 후반 스포츠 종목 중 하나인 '조정 경기'의 용어에서 왔다. 조정 경기에서 참가 선수들은 자신이 맡은 노를 힘껏 저어야 한다. 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중(weight) 만큼 당겨야(pull) 저어지고 그 결과로 배는 앞으로 나아간다. 배 안의 구성원이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감만큼 당겨야 배를 움직일 수 있다.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 낼 때 조직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개별 역할에 충실한 팀은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도 주어진다. 반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그 팀은 경쟁에서 밀리게 되고 그 결과에 따르는 책임은 고스란히 조직원의 몫으로 남는다.
우리는 매일 주어진 직무와 역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분야가 무엇이든, 어떤 형태이든, 그 일에는 책임이라는 결과가 따라온다. 결과에 대한 미래의 부담감을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을까? 간단하다. 현재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 된다. 사회나 조직은 결국 '구성원이 자신에게 주어진 1/N의 역할을 다 해낸다'라는 전제하에 움직이게 된다. 한 조직의 리더가 제시하는 비전에 구성원이 공감을 하고 의지와 신념이 더해진다면 그 조직은 서서히 성장을 하게 되고, 향후 예측 불가능한 난관에도 흔들림 없이 한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현재 역할은 무엇인가?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가?
'그렇다'라고 즉시 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으며 이에 대해 자신을 마음껏 칭찬해 줘도 좋다. 당신이 흘린 땀은 '오늘이라는 역사'가 기억할 것이며, 당신이 보인 승리의 미소가 누군가에는 자부심의 표상으로 비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웃을 수 있는 당신은 오늘이라는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진정한 '위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