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다이어트 (1) : 리미터 상실의 시대
평범한 대학생은 가난하다. 더군다나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고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는 대학생이라면 더더욱. 거기엔 나도 포함이었다.
고3 12월 첫 주의 어느 날, 대학 수시 전형 합격 발표와 동시에 부모님의 용돈 중단 선언이 있었다. 얼마 받지도 못했던 용돈인데 대학 ‘입학’도 아니고 ‘합격 발표’날부터 끊는 건 솔직히 너무하지 않나? 싶은 내 속마음은 뒤로 하고, 대학 입학도 전부터 과외를 하며 생활비를 벌던 나는 항상 빈 지갑의 그림자에 쫓기는 삶을 살았다. 학교 밖에서 밥을 먹거나 카페를 가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들기에 끼니는 거의 항상 학교 안에서 해결했다. 다행히 우리 학교에는 식당이 여러 곳 있었고 그중 학생회관 식당은 저렴하면서도 맛있고 양도 많아서 돈 없는 나에게 위로와 안식이 되어주었다.
사람이 원치 않게 배고프면 서러운 게 인지상정. 하지만 학교 식당은 밥이든 반찬이든 더 달라면 얼마든지 더 주는 따뜻한 인심을 가졌다. 배가 든든하게 채워지면 내 마음도 따뜻해졌기에 나는 열심히 학식을 챙겨먹었다. 또 종종 맛있는 디저트와 간식도 챙겨먹었다. 군대 가기 전 대학교 2학년 때까지 그렇게 지냈다.
하지만 먹는 것의 절정은 군대에서라고 할 수 있다. 난생 처음 가는 군대인데 처음 겪는 훈련소 6주가 얼마나 힘들고 서러운가. 밥이라도 배부르게 안 먹으면 억울해 쓰러졌을 거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내 머릿속 식사량의 리미트가 풀리다 못해 없어져버렸다. 훈련소 때는 간식 먹을 일이 지극히 드물기에 – 그때 먹은 간식이 제일 맛있었던 건 추억 보정일까? – 세 끼 식사를 열심히 많이 챙겨 먹었다. 군대 밥이 맛없는 건 유명하지만 배고픈데 그게 문젠가. 어차피 내 입맛도 무인 아이스크림 할인 매장처럼 저렴하기에 상관없었다.
훈련소 때는 그나마 밥 많이 먹는 것에 그쳤지만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는 드디어 말로만 듣던 BX를 갈 수 있게 됐다. 내가 갔던 부대는 규모가 매우 작은 곳이라 그런지 BX도 어지간한 동네 슈퍼마켓보다 작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가격은 매우 저렴했고 웬만한 간식은 많이 있었다. 특히 군대 와서 처음 먹어보는 ‘냉동’ 시리즈가 아주 맛있었다― 특정 브랜드는 아니고 전자레인지로 데워 먹는 치킨이나 만두 등 여러 종류의 냉동식품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맛있는 건가? 싶지만 그때는 아무래도 비교군이 군대 밥이다 보니 기름지고 짭짤하고 자극적인 냉동을 먹는 게 팍팍한 군생활의 몇 안 되는 낙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계급이 올라가고 자유도도 높아지고 알량한 월급도 아주 조금이지만 늘다 보니 BX를 자주 방문하게 됐다. 저녁밥이 도저히 못 먹겠다 싶을 정도로 맛없는 메뉴가 나오면 먹는 둥 마는 둥 적당히 넘겨버리고 BX로 달려가 냉동을 돌리며 컵라면을 끓였다. 일탈적으로 강렬한 그 맛은 아주 중독적이었다. 게다가 우리 부서에 매달 지급되는 부식비로 각종 라면을 박스 단위로 주문해 먹었는데, 사회에서는 별로 안 먹어봤던 여러 라면들을 군대에서 먹어보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겐 겨우 라면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런 것들이야말로 군 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즐기는 쾌락만큼이나 업보도 쌓이고 있었다. 그렇게 먹는 동안 소리 없이 살이 점점 찌고 있었다. 그동안 몸무게를 안 재서 심각성을 몰랐기도 했지만 굳이 지금 참을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이 더 컸다. 군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먹는 것을 합리화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살이 찔만했다. 오히려 그렇게 먹고도 살이 안 쪘으면 수많은 다이어터들이 나를 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