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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이 Jan 28. 2023

한 번의 극복

11개월짜리 행복



 

  단약 이후 참 잘 지냈다. 특별할 일 없이 평범한 일상이 만족스러웠다. 전처럼 쉽게 화내거나 우울해하지 않았다. 해본 적 없던 긍정적인 사고를 하며 나름 행복하게 살았다.

  조금 기분이 나쁘더라도 울컥 거리며 감정이 올라오지 않았고 작은 것에 기뻐했다. 당당하게 하늘을 보았고 달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바닥의 보도블록이 몇 개일지, 색은 어떤지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아래만 향했던 고개를 들어 바라본 세상은 다채로웠다. 무지개 빛으로 반짝였다. 시커먼 아스팔트가 아닌 파아란 하늘을 눈에 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어서, 귀여운 구름들이 잔뜩 떠 있어서 아름다웠다. 선선한 바람이 좋았고 맑은 공기가 몸을 채우는 느낌이 좋았다.


  가끔 우울해지는 날엔 좋아하는 간식을 먹고 나면 기분이 풀렸다. 그래도 괜찮아지지 않으면 남자친구를 만났다. 그를 만나면 금세 행복해지곤 한다.

  비가 와도 처지지 않았고, 오히려 차분히 빗소리를 감상했다.

  못해본 경험을 하는 아이처럼 모든 게 새로웠다.

나 이런 세상에 살았구나. 이게 평소 같은 일상이구나. 처음 보는 풍경을 바라보듯 신기했다. 아주 조금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오래 잿빛의 시선으로만 살아왔네, 하마터면 평생 모르고 살 뻔했어.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상태가 심각할 땐 꿈도 꾸지 못할 생각을 했다. 예를 들면 괜찮아 혹은 행복하다거나 살아 있길 잘했다와 같은. 예전이었다면 아주 작은 불행에도 전혀 괜찮지 않았을 것이고 매번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좌절했을 것이다. 역시 죽는 것이 낫겠다며 비관했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이렇게 살아온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기에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체험하는 건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했다. 내 인생은 침울하다 못해 암울하기까지 했다. 감정은 걸러짐 없이 알갱이 하나까지 침전되어 도통 떠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잠수도, 수영도 하지 못하니 그대로 꼬르륵- 물속 깊이 잠겨 있었다. 파도에 휩쓸려 아무도 모를 곳으로 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새로운 하루를 사는 것은 꽤 즐거웠다. 감정에 놀아나지 않으니 비로소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동안얼마나 흔들렸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 포기하지 말라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이제야 와닿는 참이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뭐 때문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인생 가장 행복한 11개월을 보냈다. 옅어진 기억으로 남은 것이 아쉬울 만큼. 그러나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앞으로도 이어질 행복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정말 행복할 일만 남은 줄 알았다. 괴물을 퇴치했다며 축포를 터트렸다. 그저 오만한 착각에 빠져 우울증 없는 삶을 탐닉했다. 애석하게도 행복은 명을 다했다. 예고도 없이. 가루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는지, 땅으로 꺼져버렸는지 알 수 없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11개월은 신기루였나 보다. 그때의 황홀경조차 이제는 흐릿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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