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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씨 Mar 22. 2024

1. 스토너


2024. 3. 22. 요일

[존 윌리엄스/ 김승욱 옮김/ RHK]


내일의 사이다를 기대하며 오늘 주어진 고구마를 호호 불어 먹는 기분이 드는 소설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절반부터, 나 같은 독자는 3분의 2 지점이 가서야 자극적인 입맛에 길들여진 나 같은 독자를 위해 작가가 준비한 사이다 같은 건 없음을 깨닫는다. 거름더미 속 피어난 작고 반짝이는 들꽃 같은 소소한 행복이 드문드문 박혀있을 뿐, 우리가 흔히 주인공에게 기대하는 명성이나 성공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갈 뿐이다.




빈농의 아들로 교육과는 무관한 부모 밑에 태어난 스토너는 농사일을 거들며 크다가 농사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대학교에 보내진다.


그곳에서 아처 슬론 교수를 만나게 되고 교육자로서의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약속한 4년이 흘러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도울 것인지 문학대생으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스토너는 어렵게, 자신의 단단하고 안정되지만 이제는 낯선 번데기와 이별을 고한다. 대학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자기 의지의 발현이었다.



"그는 강의에 빠져들어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문학의 힘을 파악하려고 씨름하면서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의식했다. 그러면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속한 세상으로 점점 빠져나와, 자신이 읽은 밀턴의 시나 베이컨의 에세이나 벤 존슨의 희곡이 세상을 바꿔놓았음을 알게 되었다.(p. 41)"



우리가 읽고, 쓰고, 배우는 이유이다.

내가 전부라고 믿었던 세상을 깨고 더 넓고 큰 세상으로 발돋움하는 것, 늘 입고 먹고 뱉었던 것들이 더없이 까마득해 생소해지는 경험. 그래서 더 큰 세상으로 더 빠르게 추진해 나가게 하는 힘.

바로 배움의 힘이다.


스토너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전의 스토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된 스토너는 학장 클레어몬트 집에서 열리는 리셉션 자리에서 그의 아내가 될 이디스를 만나게 된다.

변덕스럽고 히스테릭한 이디스와의 결혼생활은 독자가 보기에 부당하리만큼 불행해 보인다.

후에 스토너가 종신 교수가 된 뒤 소설 끝날 때까지 반목하게 되는 로맥스 교수, 교육자가 된다면 교육계에 재앙이 될 거라는 대학원생 워커까지 이 세 명의 악당은 스토너를 끈덕지게 괴롭히지만,

스토너는 크게 화를 내거나 덤벼들어 저항하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처할 뿐이다. 그도 안되면 상황에 순응했고, 나름대로 감사한 구석을 찾아내 감사했다.




이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진득한 피가 생각이 났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인간이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 삶.

그럴듯한 한방이 없는 보통의 삶, 분출할 데 없는 지치고 고단한 인고의 삶, 가끔은 가슴 뛰는 크고 작은 이벤트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무(無)로 졸아드는 것 같은 공허함 들이 우리의 삶과 너무나 닮아있다.


그래서 꾸역꾸역 먹는 고구마임에도, 목이 메어 컥컥거리면서도 우리는 이 소설로부터 애정 어린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스토너는 멋 모를 때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 열정은 이디스로, 그리고 캐서린으로 이어졌다. 스토너는 실패할지언정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줌으로써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다고도 했다.


암으로 숨이 넘어가면서도,

온 생애,

자신이 좋아했던 것에 끊임없이 열정을 줬다는 의미에서

스토너는 패배자가 아니다.


시종일관 추적추적 비 내리는 흐린 하늘을 연상시키는 소설 속 분위기로 인해,

좋을만하면 불쑥불쑥 나타나는 시련들로 인해,

스토너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내게

소설 말미에 스토너가 묻는다.


너는 무언가에 열정을 쏟았던 적이 있었느냐고?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나와 책 한 권만 덩그러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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