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1. 월요일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민음사]
자기를 비우는 일,
자아를 초탈하는 일,
싯다르타의 목표다.
일체의 자아를 극복하고 나면 가장 궁극적인 것, 존재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것에 눈이 뜨일 것이기 때문이다.
열반이다.
그렇다면 바라문 중에서도 최고로 존경받는 아버지는 그 길을 알고 있을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 말이다.
날마다 목욕재계를 하며 죄업을 씻어내고, 스스로를 정화시키려고 애쓰는 아버지를 보니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날, 싯다르타는 사문이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3년간의 사문 생활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초탈하는 데는 실패한다.
자아를 벗어나긴 하지만 번번이 되돌아와 고통스러운 윤회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싯다르타는 세상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켰다는 부처, 고타마의 소문을 듣게 된다.
오랜 친구 고빈다와 함께 고타마를 찾아 나서게 되고 마침내 그의 설법을 듣게 된다.
역시 그는 완성자였다. 열반에 이른 초탈자였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그를 떠난다.
해탈은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 가르침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가르침은 말로 전달된다. 말은 참뜻을 훼손하고 변조시켜 버리고 어리석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말을 사랑할 수 없노라고 고백한다. 때문에 가르침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다는 말 역시 연장선상이다.
지혜를 찾아낼 수 있고, 체험할 수도 있으며 지니고 다닐 수도 있지만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현존하는 유일의 완성자, 고타마를 떠난 이유다.
자, 이제 싯다르타는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해 속세로 들어간다.
기생 카말라와 상인 카마스와미를 스승 삼아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돈을 배웠다. 도박에도 빠졌다.
신들, 바라문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던만큼 그는 이제 모든 유희에 온 마음을 빼앗긴다.
그것은 싯다르타를 세속과 나태함에 물들게 했고 그의 영혼을 잠자게 만들었다.
무의미한 악순환 속에 그는 지치고, 늙고, 병들었다.
흉측한 몰골만이 남았다.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윤회와 번뇌를 다시금 느낀 싯다르타는 그 길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나는데, 강을 스승 삼아 강의 이야기를 듣는 바주데바는 강으로부터 경청하는 법과 경건해지는 법을 배웠다.
강물은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 강에는 현재만 있을 뿐 과거도 미래도 없다.
모든 것이 현존하며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다.
강물은 생이다. 모든 것이다.
바주데바의 조수로 함께 생활하며 싯다르타는 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던 어느 날 카말라가 낳은 자신의 아들을 만나게 되고 아들로 인해 다시 고통을 겪게 되는 싯다르타.
싯다르타와 남루하게 사는 것을 견디지 못한 아들이 도망을 치자 싯다르타는 이성을 잃을 지경이다.
그때 바주데바가 이야기한다.
"누가 사문인 싯다르타를 윤회로부터, 죄업으로부터, 탐욕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지켜 주었던가요? 아버지의 경건함, 스승들의 훈계, 자신의 자식, 자신의 구도 행위가 그를 지켜 줄 수 있었던가요?... 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그 아이에게는 제발 번뇌와 고통과 환멸이 면제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기 때문에, 당신 아들에게는 그 길이 혹시 면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믿고 있는 겁니까? 그렇지만 설령 당신이 아들 대신 열 번을 죽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 아이의 운명을 눈곱만큼이라도 덜어 줄 수는 없을 겁니다."
지독한 윤회를 느낀다.
윤회의 고통을 끊어낼 수 있는 자,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밖에 없음을
싯다르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싯다르타는 모든 생명의 단일성을 의식한다.
강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비가 되어 하늘로부터 다시 아래로 떨어져서 샘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새롭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으며 또다시 새롭게 흘러갔다.
인간의 삶과 같다.
돌고 돌지만, 하나다.
아이에게는 노인이 있고, 생에는 사가 있다. 죄업에 자비가 있고, 죄악과 신성함이 같고,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 같다.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해,
단일성을 이루기 위해
싯다르타가 향락에 담겼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씨앗하나조차도 오래전부터 항상 모든 것이었다.
그것은
단일성이다
동시성이다.
모든 형상들과 얼굴들이 각각 서로서로 도우면서,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서로서로 미워하면서 서로서로 파멸시키면서, 서로서로 새로운 생명체를 잉태시키면서 서로 간에 수천 가지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그 형상들과 얼굴들 하나하나가 모두 일종의 죽음에의 의지였으며, 덧없음에 대한 심히 고통스러운 고백이었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도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 모두는 단지 모습을 바꾸고 있었을 뿐이며,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났으며, 그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든 형상들과 얼굴들은 멈추어 서기도 하고, 흘러가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떠내려가기도 하다가 마침내 서로 뒤섞여 하나가 되어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흘러가는 온갖 형상들을 내려다보며 단일성의 미소, 동시성의 미소를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