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올의 머리카락이, 숙인 머리 앞으로 내려와 모기처럼 나를 약 올리는 것 또한 한몫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하지만 결연함 따위는 없었다.
그저 더운 데다 짜증이 났을 뿐.
나는 독서실 문을 박차고 나가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미용실로 향했다.
"잘라주세요"
"다듬게?"
"쳐주세요"
아주머니의 동공의 떨림이 손끝으로 옮겨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 짧게요"
"아니.. 학생.. 더 짧으면..
어디 군대가?"
"아뇨"
"그럼 운동하나 보네"
"아닙니다"
굳게 다문 내 입술 끝을 바라보던 아주머니는 긴 한숨과 함께 미용도구함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바리깡이었다.
귀 옆으로 시원하게 올라가는 맨머리를 바라보며,
발 끝에서부터 청량감이 차올랐다면
미쳤다고 할까.
나는 그냥.. 너무 더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날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자중학교인 우리 학교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흘끔흘끔 에서 쪽지로, 편지로, 음료수로 그것은 세를 불려 나갔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것이 인지상정.
그날부터 나는 남자 같음(?)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그들의 판단이 내 행동을 규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복치마 대신 체육복 바지를 입어야 했고,
남자같이 뛰어다녀야 했고,
털털함과 단순함, 무신경함을 학습해야 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를 저버릴수는 없었다.
나는 그냥 더웠을 뿐이었는데,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가면은 벗겨지는 법,
사건은 봄 소풍으로 간 놀이공원에서 터졌다.
무시무시한 놀이기구들과 남자다움(?),
감이 오지 않는가?
하지만 이번만은 도저히 연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내겐 고소공포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늘 자전거 타다가 실신 직전까지 갔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내 친구들도 굳이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내내, 나는 조상님들 안부를 그렇게 물었다. 묻는 김에 하나님께도 부처에게도 알라신에게도 물었다. 묻다 묻다 입가에 게거품까지 물게 된 나를 발견한 건 우리 반 최고의 촉새 김 아무개였다.
아직도 그 아이들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약간의 민망함과 후회, 차갑게 식은 눈빛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경멸까지.
그 후로 나는 지긋지긋했던 남자 같음(?)과 결별할 수 있었다.
즉흥적으로 자른 머리카락으로 인해 친구들의 환상을 채워줘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나는 그 환상을 깸으로써 내 삶의 궤도로 돌아왔으나,
여기,
타인의 말에 완전히 잠식당해 버린 여자가 있다.
바로 '깊이에의 강요' 주인공 여류화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좀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목숨말이다.
전도양양한 미모의 여류화가를 자살로 이끈 것은 한마디 말이었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깊이가 부족하다고?
... 깊이??
지극히 주관적인 이 지껄임은 언론의 확대 재생산을 유도했고, 대중들의 수군거림을 이끌어냈으며, 급기야 이 여류화가에 대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예단은 화가의 발끝부터 시작해 머리까지 먹어 들어간다. 이제는 화가 자신도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는 지경이다.
'나는.. 깊이가 없어..!'
급기야 화가는 자신의 모든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텔레비전 방송탑으로 올라가서 투신하기에 이른다.
타인의 시선, 타인의 말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추가 되는가? 사회적인 동물로서 우리는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미덕을 갖출 필요는 있지만, 그 말이 우리의 삶을 넘어 우리 자신을 갉아먹게 두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