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씨 May 08. 2024

21.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이 참아왔다

2024년 5월 8일 수요일

[강현식, 최은혜 지음/ 생각의 길]



오랜만에 온 가족이 외식을 하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배스킨라빈스에 들렀다.

못 보던 키오스크 기계가 한대 놓여 있었다. 

처음 사용하는 거라 조금 버벅댔는데

뒤늦게 들어온 여자 두 명이 내 뒤에서 말을 한다. 


"더럽게 늦네"

"그러게. 왜 저래?"

"ㅋㅋ야, 머리핀 봐. 되게 크다.ㅋㅋ"

"개웃기네ㅋㅋㅋ"


그들은 그 후로도 한참을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품평하며 비웃고 조롱했다.

바로 내 등 뒤에서.


나는 어떻게 했을까?


참았다.


자리를 양보하고 다시 줄을 섰다. 


생각해 보면 이런 비슷한 일들이 내게 셀 수 없이 많이 일어났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해야 할 말을 못 하고 뒤돌아 화를 삭였다. 


당황하고 부끄러웠던 당시의 감정은 고스란히 '화' 창고에 쌓였다. 16543892번의 번호표를 달고.

나의 16543892 번들은 우울증 약이 되어 내 손에 쥐어졌다.


나는 왜 화를 내지 못할까?


뭐, 헐크로 변해 뒤집어엎으라는 것도 아니고, 자객이 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그들의 경혈에 비수를 꽂아 넣으라는 것도 아닌데, 상황에 맞는 적절한 항의를, 나는 왜 하지 못하는 걸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방구석 여포'로 변신해 적토마를 타고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집안사람들에게 전방위로 꾹꾹 눌러 담은 화를 분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울한 엄마가 뿜어내는 음울한 기운 또한 좋을 건 없을 것이었다. 나는 무슨 수를 내야 했다.





고민 중인 내게 도서관 서가의 한 노란 책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이 참아왔다』


내가 썼나?


홀린 듯이 책을 펼쳤고, 목차를 봤고,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화를 적절하게 표현(처리) 하지 못하는 8명의 인물이 나온다. 그 일화와 원인, 해결책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나의 경우를 봤을 때, 8명 각각의 상황에 조금씩 걸쳐져서 나타났으나, 가장 유사한 사람은 1장의 '가연'이었다. 


가연은 어머니에게로부터 '화는 나쁜 것이다'를 주입받으며 자랐다. 그런 어머니에게 한 번씩 짜증을 부리면 '너까지 나를 힘들게 하냐'며, 어머니는 가연에게 죄책감을 안겨 주었다.


사랑받고 싶은 가연은 내면에 일어나는 '화'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인정하지 않기 시작했다. '화'를 억눌렀다. 화'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가연은 '착한 아이'가 되었다.


가연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지만, 사람들은 정반대였다. 배려할수록 무시받을 때가 잦았다. 친구들도, 가게 점원도 그랬다. 불만과 불편을 호소하지 않고 잘 참아주는 가연은 무시하면서, 예민하고 까다로우며 화를 잘 내는 다른 사람에게는 더 큰 배려와 친절을 베풀었다.


그 상황이 반복되자 가연은 혼란스러웠고, 스트레스를 받았고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되어 갔다. 

주체할 수 없는 화가 분출되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참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폭발을 하니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여기서 가연과 나의 차이점이 나온다.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 나는 그것을 참아 급기야 병이 된 반면, 가연은 엑셀을 너무 밟아 분노게이지의 선을 넘어 버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비합리적 신념에 주목한다. 어떤 사건이 발생한 것을 우리는 나름의 '생각/신념'을 통해 어떤 결괏값을 낼 것인지 결정하는데, 그 '생각/신념'이 비합리적일 때 우리는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합리적 신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항상, 절대'라는 말이 들어가는 극단적인 생각이다.  


이것을 논리성, 현실성, 유용성에 적합한 합리적 신념으로 바꾸어야 한다.  '~해야 한다'에서 '~하면 좋겠다'는 소망의 생각으로, '모든, 항상, 절대'에서 '그럴 수도 있지'와 같은 유연한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르바이트생은 손님이 들어오면 웃는 얼굴로 맞이해야 한다'에서 '~웃는 얼굴로 맞이했으면 좋겠다'로, '언제나 앞서 온 사람이 먼저 안내를 받아야 한다'에서 '순서대로 안내를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로 바꿔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심리적 고통이 오로지 환경에 있는데 그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내 생각과 관점을 바꾸어 그것에 대처하라는 것이다. 그 편이 더 쉬우므로. 


솔직한 심정은 '약간 정신승리 같은데?' 싶으면서도, 가장 손쉬운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가장 기본적으로 '화'라는 감정을 인정하고, 건강하게 갈등하는 경험을 실제로 연습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화가 난 감정을 구체적이고 명확한 언어로 단호하게 표현함으로써 건강하게 갈등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건강하게 갈등하는 경험, 나에게 이것이 핵심이었다.  

이것이 부족했다. 그동안 회피하기만 했다. 다시 갈등 상황이 생긴다면, 좋은 연습 상대로 생각하고 써먹어봐야겠다. 


이 외에도 폭력을 대물림하는 이유에 대해 '거울 뉴런' 신경세포를 이야기한다. 이 세포로 인해 다른 사람의 행동을 거울처럼 반영하게 된다는 것, 우리가 부모님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노=폭력을 분리하고 구체적이고 단호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것을 당부했다. 


또 화가 나면 입을 딱 닫는 사람의 경우는 수동-공격 성격 장애로 의심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적절한 행위를 요구하는 데 대해 부정적인 태도나 수동적인 저항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내놓았다. 


또 회피성 성격 장애로, 주요 우울 장애 및 학습된 무기력으로, 파괴적 기분 조절 부전 장애로, 경계선 성격 장애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화를 적절하게 내는 방법을 잊은 사람들이 나온다. 저자는 그 양상들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솔루션을 제공한다. 




'대혐오의 시대'라고도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화를 어떻게 내고 있는가? 바람은 모두가 이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평소 '화'습관에 대해 돌아보고 올바르게 '화'를 내는 방법을 터득하고 연습해 보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내심을 갖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꾼다면 세상은 조금 말랑말랑해지지 않을까. 

 


이전 20화 20. 파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