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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씨 May 06. 2024

20. 파과

2024년 5월 13일 월요일

[구병모 지음/ 위즈덤하우스/ p.342]]



"젊은 년이 눈 똑바로 뜨고 대드냐. 노인 앞에 두고 모른 척 핸드폰이나 쳐 들여다보는 주제에. 세상에 너 혼자만 애 뱄냐? 혼자만 애 낳아? 어른 말씀하시는데 꼬박꼬박 말대꾸야?"


지하철 노약자석 앞에서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남자가 다소 만만한 여자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밀면서 욕지거리를 한다. 이 순간만큼 지하철 내 사람들은 조용히 졸기로 합의를 본다. 여자는 눈물을 흩뿌리며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고, 남자 또한 몇 정거장을 지나자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뒤를 바싹 붙어 서는 할머니가 있다.


조각(爪角)이다.


문이 열리고 지하철 안으로 다급하게 쳐들어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남자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조각은 그를 뒤고 하고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온다.


그녀는 65세, 현역 살인청부업자(방역업자)다.  


65세의 살인청부업자, 게다가 여자라니, 소재에서부터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리고 저 강렬한 도입부를 보라. 한 번 슬쩍 맛본 사람은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오도 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털게 만든다. 또 이 책은 만연체로 쓰인 것으로  유명하다. 만연체가 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마침표 찾느라 눈알이 바쁘다. 한 문장을 다 읽고 나서 뇌까린다. "뭔 말이여~".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외국어로 쓰인 글도 아닌데 옆에 사전 끼고 읽어야 한다. 그만큼 처음 보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써먹고 싶어서 단어장을 만들었다.  

기분 좋은 피로감이 전신을 감싼다.


파과


[破瓜] 16세의 여성, 조각은 16세 즈음 이 업을 시작했다.

[破果] 흠집이 난 과일, 모든 상하고 깨진 것, 낡은 것의 상징, 현재의 자기 자신을 이르는 말이리라. 후반부에 조각이 눈에 담은 남자, 그 부모의 과일가게에서 사 온 복숭아는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 사이 시큼한 시취를 풍기며 냉장고 벽에 들러붙었다. 그 살점들을 손톱으로 긁어내며 그녀는 어깨를 떨었다.


20년 전에 산 300리터짜리 냉장고, 갈색의 물컹한 복숭아, 65세의 방역업자(살인청부업자) 조각(爪角).

한때 반짝였던 그것들은 이제 고장, 단종, 교체, 찌꺼기, 낡음, 갈색의 단어들로 환치되었다.


찬란하게 빛나다 금세 사그라드는 찰나의 순간이라는 인간의 생, 업계에서 날카롭고 빈틈없이 깔끔하게 일 처리 한다 하여 붙여진 손톱이라는 닉네임의 조각은 느지막한 나이에 자그마한 10개의 손톱으로 기능이 아닌 욕망을 흘려보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불편함에 자리를 뜨지만, 이제는 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된다는 것을, 모든 것이 상실되기에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다시 찾은 네일아트가게에서 이번에는 자리를 뜨지 않고 조용히 손톱을 내맡긴다. 이번에는 다섯 개의 손톱으로, 별똥별 같은 욕망을 무심히 흘러 내 보낸다.  





<줄거리입니다. 결말이 나와 있습니다.>



7평짜리 단칸방에서 6남매, 쉽지 않은 살림에 입 하나 덜자고 친척집에 맡겨진 것은 둘째, '조각'이었다. 식모 겸 더부살이를 하던 중, 친척 언니의 예물을 훔친 것을 오빠에게 들키면서 그 집에서마저 쫓겨났다. 거리를 배회하던 조각을 구해준 것은 '류'였다. 살인청부업(방역업), 그 모든 것의 시작, '류'. 조각의 재능을 알아본 그는 조각에게 모든 기술을 전수하고, 업자로 사용한다.

'류'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조각은,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좋다.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


한편, 주택 건설업을 하던 중년의 남자를 방역(=살해)하라는 지시가 내려오고 조각은 가사도우미로 위장, 대학 교수인 와이프는 해외로 학술 세미나를, 아들은 학원을 간 시간에 그를 해치운다. 한 가지 삐끗한 점은 마무리즈음에 아들이 돌아와 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당했다는 것이다. 베란다를 통해 빠져나가기 전 조각은 아들에게 '잊어버리'라고 말하지만, 아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아들은 끝내 이 책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30대 중반의 방역업자 '투우'다. 자신의 아버지 머리에 구멍을 낸 그녀, 잠시지만 함께 하면서 알약을  못 삼키는 자신을 위해 알레르리약을 정성스럽게 손절구로 빻아 내밀었던 그녀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리고 같은 방역업자가 되어 아버지와 관련된 서류를 찾으면서 그녀, '조각'의 실체에 한 발 더 다가간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전설이지만 이미 60대 중반으로 낡디 낡은 몸을 가진 조각, '투우'는 그녀 뒤를 밟는다.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


조각이 마음에 둔 남자, 30대 중후반의 내과의 강 박사.

방역 중 부상을 당해 에이전시와 연결된 병원의 장 박사를 찾지만, 그곳에 있던 것은 월급쟁이 의사 강 박사다. 자신의 정체를 들켰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의 부모의 과일가게를 찾는다. 인심 좋은 부와 모, 그리고 딸 해니까지. 이끼류 같은 건 돋아날 드팀새도 없이 확고부동한 햇발 아래 뿌리내린 사람들을 응시하던 조각, 그런 조각을 투우가 보고 있다.


어느새 류와 했던 약속을 깨고 지켜야 할 것을 만들어 버린 조각은, 강 박사의 딸 해니를 인질로 잡고 자신의 목숨을 협상하는 투우앞에 마침내 몸을 드러낸다.


오고 가는 실소와 비명,  칼들 사이에서 너덜너덜해진 둘은  기어이 무릎이 꺾인다. 치명상을 입은 투우는 그녀의 무릎에 기댄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중얼거린다.

"네가 바로 그 애구나."


꺼져 가던 투우의 눈동자가 다시 열린다.

"정말, 기억해?"


조각은 투우의 눈을 감기며 얘기한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투우는 궁금해서 못겼뎐을 것이다.

방역업자로 오로지 단 하나의 목표를 갖고 집에 들어와 때를 보던 조각이, 자신의 알레르기 약을 때마다 곱게 갈아 눈앞에 내밀었던 이유 말이다. 하고 있는 일과 너무 상반된 그 행위가 투우의 가슴에 박혀 오랜 시간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방역에 나섰던 조각이 자기 앞을 가로막는 리어카 할아버지를 돕는 모습을 떠올리며 투우는 말한다.


"그러니까 그 중요한 상황에 왜 사람을 돕는데? 인지상정? 인간에 대한 예의?... 당신이 이날 이때까지 해온 일과 살아온 방식을 생각하면 그거 너무 뻔뻔하지 않아?... 당신을 이렇게 뻔뻔하게 만든 작자... 정확히 말하자면 한 명밖에 없지,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투우가 한 건 뭘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복수가 아니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조각은 또 다시 살아남아, 생을 살아간다.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연민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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