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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우 Oct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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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추석 연휴 내내 일만 했던 터라 오늘 하루만큼은 조금 늦게 출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상 영업일 날 약간 늑장을 부린 것에 대한 천벌이 눈을 뜨자마자 내려졌다. 찌뿌둥한 몸을 겨우 일으켜고 식탁에 앉는 순간 사흘 뒤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터져야 할 폭죽이 내 머릿속에서 미리 터진 듯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눈앞이 새하얘졌다. 곧 삐-하고 트럼펫 탈을 쓴 이명 소리가 들려왔다. 구토가 밀려온다. 웃긴 건 이 와중에 배는 왜 이리 고픈지 미치고 팔짝 뛰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불안감 즉, 죽어 보진 않았지만 곧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정신을 집어삼킨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한 우리 아버지는 급하게 구급차를 불렀다. 이상하게 그의 전화 한 통은 유년시절 독감에 걸렸을 때 나를 괜찮다고 토닥여 주었던 우리 어머니의 목소리와 손길보다 더 안심이 되었다. 엄마, 미안해.


응급실에 도착할 때까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게끔 하는 노력을 지속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열심히 고생했다는 결과야. 그러니까 몸에서 반응한 거고. 병원 가서 치료받으면 괜찮아질 거야.' 라며 드라마 한 편 속 대사가 되기를 바라는 말을 되새김질했다. 일종의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정의했다. 쨌든 어찌어찌 버티며 응급실에 도착했다. 곧바로 담당 의사는 "어디가 아파서?" 라며 뒷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문법을 시전 하며 물었다. 기분 나쁜 내색조차 할 기운도 없던 나는 "갑자기 열이 나고 삭신이 쑤시네요. 그리고.." 라며 말을 이어 가던 도중 "삭신이 쑤시는 건 열 나서 그런 거고~" 라며 말을 귀가 막히게 끊어내는 무례한 의사. 아, 나와 우리 아버지의 겉모습만 보고 무례한 것인가. 내 인적 사항이 그에게는 볼품없었기에 함부로 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인가. 그의 언행이 무례하다는 부정적 결과에 대한 원인 제공이 오히려 내 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뭘까.


일단 기운부터 차리고 잘잘못을 따지기로 했다. 해열제와 수액이 내 혈관을 타고 들어온 지 이 십 여분이 흐르자 그가 다시 내 영역에 침범했다. 굳게 닫힌 새하얀 쉬폰 커튼을 바깥쪽에서 힘껏 걷어치우는 소리와 동시에 "야, 일어나! 이제 괜찮잖아~"라는 드라마 한 편 속 대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분노에 가득 찬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곧장 그의 네이비 색 진료복 왼쪽 가슴에 하얗게 오버로크 된 이름 석자를 보았다.


김행복.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명의가 분명했다. 이따금 그의 언행을 되새김질했다. 얼마나 아프다고 이런 걸로 응급실까지 찾아왔느냐. 미리 예방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지 않느냐는 소리로 착각하기로 했다. 미리 예방했더라면 잘 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쉼에 대한 철학이 생긴 듯하다. 잘 쉬고 싶다면 에너지를 쓸데없이 낭비하지 말자고. 바람이 없는 돛단배처럼. 돛이 달린 배. 풍향, 풍속에 따라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이 결정되는 그러한 배. 만일 바람이 없다면 돛단배는 목적지를 향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돛단배는 바람이 없으면 나아갈 수 없다. 바람은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의 힘으로 다스릴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자연스러움'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연 그대로. 내 힘으로 될 수 없다면 자연스럽게 흘러 보내기도 해 보자는 것이다. 바람이 없는 돛단배 위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처럼.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것이 잘 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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