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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우 May 07. 2023

아로새기다

스물여덟, 그때 나는 방 안에서 쳇 베이커 음악을 듣고 있었다. 담배를 태우기엔 충분히 크지 않은 방이었다. 그의 무반주 「blue room」은 담배 대신 고독을 태울 수 있도록 무드를 연출해 주었다. 사랑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는 절대 마시지 않는 술 한 잔을 더하기로 했다. 하얗고 목이 긴 주광빛의 스탠드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위스키 한 보틀이 눈에 띄었다. 노랗고 황금빛 라벨이 늘 인상적이었다. 도쿄를 다녀온 뒤 혁이네에서 라 붐을 위한 선물이었다는 것은 안 비밀이다. 샷 글라스에 쪼르륵 한가득 담았다. 바로 윗입술을 적시기엔 아직 어색했다. 다시 온 더락 글라스를 꺼내 놓고 방구석 냉장고 안 사각 얼음을 한가득 채운 뒤 샷 글라스를 냅다 부었다. 젓가락 한 가닥을 꼽고 시계방향으로 휙휙 얼음을 들썩들썩. 바로 윗입술을 적시기엔 쳇 베이커 트럼펫 독주처럼 완벽했다.


이상하리만큼 내일이 기대가 되는 밤이었다.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고, 나 역시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이 더 기다려졌다. 심장 옆 사알짝 빗나간 마음 한 구석이 외롭긴 했지만. 외로움 때문에 술맛이 쓴 건지 헷갈리기 시작하자마자 위스키 한 잔을 더하기로 했다. 술 때문에 쓴 것이라고 핑계를 대기 위한 샷 추가는 안 비밀이다. 이 밤이 쓰지 않고 달게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달달하게 전환시켜야만 했다. 쳇 베이커가 「I fall in Love Too Easily」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일이 오면 나의 마지막 예비군 소집일이다. 오전 열두 시가 넘어서 오늘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끔찍하게 귀찮고 지루한 날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날이었다. 이전에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던 신뢰성과 타당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심층적 분석 덕분에 잘 알 수 있었다. 어쨌든 그런 날이었다.


“내일 분명 내게 귀감이 되는 사람이 반드시 올 거야.” 라며 나는 술에 취한 듯 중얼거렸다. 노랫말 같지도 않은 독백을 달달 외우면서 달달한 밤과 함께 잠에 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내일 오후 두 시에 어중간하게 맞춰 당당하게 입소 장소에 들어갔다. 반가운 얼굴을 하고 온 고등학교 동창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그중 주 5일 출근 동안 나흘은 음주가무로 살아야 한다는 준이 무척 반가웠다. 반가움은 금세 사라지고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과 축 늘어진 듯하면서 땅땅한 배를 짊어진 그의 건강이 염려됐다. 그래도 그는 자기만의 커리어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 한마디에 그에 대한 걱정은 쓸데없이 연예인 걱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고 생각했다. 오후 네 시가 되자 청취자 없는 준과의 라디오가 마침내 종영됐다. 메마른 연회색 진흙으로 덮인 까만 군화소리만 들리다가도 어느새 투덜투덜 신세 한탄 소리가 들려왔다. 소집 장소에서 벗어나 우리 동네 순회공연을 할 때가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크서틀 한가득 준이 내일의 귀감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그도 귀감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군인 아저씨다! 충성! 충성!” 마을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에서 축구를 하다 멈춘 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스스로 너나 할 거 없이 내가 군계일학이라고 생각하며 동네를 터벅터벅 걸었다. 미래에 자신도 이 무리에 편성될지도 정확히 모르는 초등학생의 순수한 인사를 받은 나는 대견해하며 피식 정도의 미소를 띠었다. 이후 심심한 행군을 계속 이어갔다. 일면식 수준 이상의 동창들과 다른 소대에 편성돼 더욱 외롭게 느껴졌다. 반환점에 도착하고 꽉 찬 십 분 정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건빵 주머니에 구겨진 담배를 꺼내어 태우며 동창들과 노닥거리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알차게 지나갔다. 다시 소집장소로 돌아가는 길은 반환점을 향해 가는 길보다 짧겠다고 생각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앞에서 걷던 슬림한 허리에 넓은 어깨와 큰 키, 피부는 하얗고 큰 눈과 빅마우스인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혹시 자기가 아는 사람이 맞는지 의아해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맞았다. 빅마우스가 예상했던 사람이 내가 정확히 맞았다. 그리고 그는 지난 달달한 밤에 그토록 찾던 내게 귀감이 되는 사람이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정말 존재했던가. 그는 내 왼쪽 가슴에 오버로크된 명찰을 확인하고 다시 내 얼굴을 바라본 뒤 되게 독특한 인사를 건넸다. “맞아! 네가 맞았어. 중학교 때 네가 굉장히 밝았던 게 생각났어. 분명히 내가 인사를 하면 또 밝게 받아 줄 것 같았어. 오랜만이다!” 라며 의아해 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확신으로 가득 찬 얼굴로 말이다. 사실 나는 그의 기대에 부흥하리만큼 액션을 취하진 못했다. 그때처럼 아니 “그때 내가 밝았었나?” 라며 속으로 빅마우스에게 물었다. 그는 이어서 하와유 증후군이 있는 내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을 던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그의 큰 눈과 입으로부터 최면에 걸린 것처럼 삶의 전반부를 토로하고 있었다. 빅마우스도 만만치 않게 그의 일상을 내게 공유하고 미친 듯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는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예고 진학을 선택하고 십 년 가까이 배우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변화가 두려운 내게 배우를 잠시 멈추고 싶다며 고백했다. 슬럼프가 온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나와는 달리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다르게 생각한 듯했다. 내게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꾸준하게 잘해오던 일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을 기록하고는 결론을 애써 버티기 혹은 그럴듯한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넬 뿐이었다. 빅마우스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달랐다. 배우일지와 운동일지를 늘 작성하며 성장해 왔기에 그렇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며 답했다. 그도 처음엔 변화를 두려워했지만 오히려 이 감정이 자신을 더 성장시키는 일이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는 점이다. 나의 마음기록 일지와 그의 성장일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내게 부족한 것은 마음만 기록했던 것이다.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갈수록 그와 공통점 속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배우를 잠시 멈춘다는 말이 영원히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쉬면서 토끼처럼 움츠렸다 껑충 비상하려는 듯해 보였다. 그렇게 빅마우스와 청취자 없는 보이는 라디오를 종영했다. 나는 트럼펫 소리 가득한 쳇 베이커의 「blue room」이 흐르는 방구석 Bar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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