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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 여고동창회 송년의 밤

그 밤 마음은 오래도록 따뜻했다. 나의 모교 광주사레지오여고

by 박규리

다정함으로 채워진 만찬의 시작

개회사가 끝나고 내빈 소개와 축사가 이어지는 동안, 홀 안에는 묘한 설렘과 묵직한 기대가 공존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얼굴들, 그들이 건네는 인사 속에는 세월의 골도, 따뜻한 정(情)도 동시에 묻어 있었다. 코스요리가 하나둘씩 테이블 위에 올려지고, “짠~!” 하고 와인잔을 살짝 부딪힐 때마다, 살며시 번지는 웃음은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한 온기 같았다.


식사 내내 들려오던 재잘거림, 반짝이는 잔과 포크 소리가 섞여 만들어낸 그 밤의 분위기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1년의 시간, 무대 위에서 빛나다

식사가 끝나고 무대의 조명이 켜지자, 올해를 준비하며 갈고닦은 공연이 하나씩 이어졌다.
노래, 리코더, 댄스경연, 그 모든 순서 속에서 참가자들의 진심이 흘렀다.

손가락 끝에 남은 떨림, 무대를 향한 집중된 눈빛, 그리고 작은 실수마저도 빛나는 열정으로 뒤덮는 기운.
그 무대에는 ‘한 해를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만이 내는 빛’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우리 모두 참 열심히 살아냈구나” 하는 감탄이 올라왔다.


마음을 사로잡은 초청가수의 무대

그리고 드디어 초청가수 공연. 회장님이 많은 정성과 비용을 들여 모셔온 두 분의 가수:남궁옥분, 그리고 최성수 씨, 그들도 우리랑 같이 나이 들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남궁옥분의 첫 곡, <사랑사랑 누가 말했나>가 홀 안을 가득 채우는 순간,

나는 전율을 느꼈다.


오랜만에 듣는 라이브노래인 데다 그녀만의 독특한 음색이 나이 듦을 무색하게 하였다. 그녀는 마치 관객 한 명 한 명을 노래 속으로 초대하는 듯했다. 윤형주와 안치환의 노래가 이어지고 그녀의 노래는 점점 모두를 한 덩어리로 묶어냈다.

어느새 우리는 큰 호흡 하나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 안의 “싱어롱 감성”을 깨운 순간

나는 젊은 시절, 종로의 작은 싱어롱 카페에서 하루의 피곤을 털어내곤 했다. 가수와 관객이 함께 부르는 그 독특한 기쁨 '참여가 만드는 신기한 에너지'가 있었다. 그게 나는 참 좋았다.


그래서일까,
이날 무대에서 남궁옥분이 관객들에게 함께 노래 부르게 했을 때 내 안의 ‘그때 그 감성’이 정말 오랜만에 터져 나왔다.


그녀는 단순히 노래를 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를 노래를 부르며 하나가 되게 만들어주었다. 함께 목청을 높이고, 손을 흔들고, 가사 하나하나를 새기며 부르는 노래는 우리를 고교시절과 청춘으로 되돌려 놓았다. 어느 순간, 관객 몇몇이 노래에 맞추어 촛불행렬처럼 줄지어 움직였다. 우리들은 모두 일어나서 그 뒤를 따랐다. 노래에 맞추어 300여 명의 행렬이 행사장에서 자연스럽게 물결처럼 흘러 다녔다.

마치 성모성월에 촛불을 같이 들고 함께 행렬을 했던 것처럼 그것이 이 행사장에서도 재현되고 있었다. 의자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노래에 몸을 실어 흐르는 그 장면은 정말 장관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이게 바로 살레지오 문화구나" 하는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밀려왔다.


60년의 전통이 만든 품격과 흥

1회 대선배부터 내가 속한 19기, 지금 회장단으로 활동한 21기, 차기 회장단 22기, 막내인 29기까지. 세대도 다양하고 삶의 결도 다르지만 오늘의 분위기만큼은 한결같았다.

흥이 있으면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 품격,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도 자연스레 유지되는 배려, 이 모든 것이
60년을 쌓아온 살레지오의 전통이었다. 환갑을 넘긴 우리의 연륜만큼 켜켜이 쌓인 빛나는 전통, 그 속에서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참 행복한 순간이었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는 학창 시절의 세 장면

송년의 밤을 앉아서 지켜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학창 시절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세 장면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첫째는 솔선수범으로 우리를 이끄신 레지나 교장수녀님이다.

교장수녀님은 늘 앞서서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화장실 청소조차 직접 고무장갑을 끼고 솔선수범하셨다. 음악실에서 가곡을 부르고 있으면 조용히 바람처럼 오셔서 한 곡 같이 부르고 가시곤 했다. 고3 때 강당에 우리를 모아놓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내 귓가를 울리는 듯하다.


“지금 여러분은 대학의 합격선을 밟고 있는지도 몰라요. 여기서 한걸음 더 노력하면 합격이고, 포기하면 결과가 달라집니다. 여러분, 힘내요. 우리! 한 발짝만 더.”

그 말씀은 열여덟 살의 나를 조금 더 노력하게 하고 일으켜 세운 힘이었다.


그 덕분일까.
그 해 우리 19기는 서울에 있는 학교에 많이 입성했다. 서울대도 많이 갔고, 나는 서울교대에, 이대에도 10명이나 합격할 정도로 대학입학 성적이 좋았다. 우리를 향한 교장수녀님의 진심 어린 격려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둘째는 보니나 수녀님의 ‘눈 맞춤 인사’

보니나 수녀님의 등하교 지도는 규칙을 지키지 않은 학생을 잡아내는 교문지도가 아니었다.
학생 한 명 한 명의 표정을 읽어내고 그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사랑의 시간이었다.


“어서 와.”
“표정이 조금 어둡네. 무슨 일 있니?”
소리치지 않고, 다그치지 않고, 조용히 ‘살피는 마음’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나는 난생처음 엄마품을 떠나 혼자 자취를 하였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나는 버스를 놓칠까 봐 교문을 향해 용수철처럼 뛰어갔는데 수녀님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아, 오늘 엄마한테 가는구나?”
그 한마디는 지금도 내 마음에 작은 등불처럼 남아 있다. 그 많은 아이들 중에 나를 알아보시고 말을 걸어주신 수녀님의 따뜻한 사랑이 나의 교직에도 영향을 주었다. 나도 따뜻하고 친절한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셋째는 비를 맞으며 학교로 올라오신 아버지

그리고 2학년 봄학기 어느 날. 시골에서 아버지가 등록금을 들고 갑자기 올라오셨다.


일하시다 비가 오자 바로 일을 멈추고 ‘오늘은 갈 수 있겠다’ 싶어 곧장 버스에 몸을 싣고 오셨던 것이다.

우산도 챙기지 않고 오셔서 머리도 양복도 비에 젖어버렸다. 비를 맞으며 돌아가시는 아버님의 뒷모습을 보다 '아버지 조심히 가시라.'라고 말도 채 끝내지 못한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의 젖은 양복처럼 내 마음도 젖어버렸다.


‘아버지, 저 열심히 할게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그 다짐은 그날 이후 내 삶을 움직이는 작은 영혼의 닻이 되었다.


최성수의 무대, 추억이 노래가 되어 흐르다

남궁옥분의 무대가 끝나고 등장한 사람은 최성수. 히트곡을 많이 가진 가수라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관객들 입에서 자동으로 가사가 흘러나왔다.

나는 특히 ‘동행’을 좋아한다. 그 노래의 잔잔한 중저음을 따라 부르다 보니 익숙한 감정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젊은 날의 풍경, 누군가와 나란히 걷던 거리, 그 모든 장면들이 스르르 마음속으로 밀려왔다.

좋아하는 연예인과 악수를 하면 좋은 감정이 6개월은 간다고 한다. 남궁옥분 님과 악수한 이 귀한 기억을 품고 또 6개월을 잘 살아보련다.

마지막을 채운 노래, ‘만남’

댄스경연 시상이 끝났다. 어려운 삼바곡을 소화해 낸 19기는 다른 기수에게 대상을 내주었다.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모두가 손을 잡고 부른 마지막 노래는 ‘만남’이었다. 손끝이 맞닿는 순간,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그래,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구나”

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전통을 세우고 이어가는 사람들

오랜만에 참석한 송년의 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며 나는 마음 깊이 감사함이 올라왔다.

이렇게 멋진 전통을 세워준 선배님들, 묵묵히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후배님들, 그리고 21기의 헌신적인 봉사와 회장님의 통 큰 기부, 십시일반 기부해 준 따뜻한 손길들.....

그 모든 마음들이 모여 2025년 송년의 밤을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나는 내가 사레지오 동문인 게 자랑스러웠다. 팍팍한 서울살이에 오랜만에 동문을 보고 힘과 위로를 받는 시간이었다. 아직도 송년의 밤의 여운이 가득하다.


19기 친구들아, 알지?

이렇게 좋은 날은 흔치 않아. 흔치 않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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