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 中
동생과 함께 몇 년 간 해오던 가게를 접고 현재의 나는 웅이의 일을 도와가며 가정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여행이 아닌 본격적으로 살기 위해 미국 땅을 다시 밟고서 한두 달간은 방황을 많이 하였다. 정말로 나의 ‘직업’이란 타이틀이 사라졌다는 게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의 미국에서의 비자 신분은 확실하지만, 일을 할 수는 없는 비자이다. 그렇기에 과거 경력을 발판 삼아 무언가를 시도해 볼 조차의 생각도 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한동안은 미국에 와서 내 인생의 경력이 단절된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나를 압도했고, 뭔가를 시간 내서라도 해볼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휩싸여 지냈다. 지금 당장 일을 시작할 수는 없지만, 차후에 내가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하며 말이다.
한 번은 웅이의 고객이었던, 미국 현지인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어쩌다 내게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으로 이어진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쉽게 이런 답변이 튀어나와 버렸다.
“I’m just a housewife” (저는 그냥 일개 주부예요)
나의 무의식에 담긴 직업적인 주눅감이 말로 튀어나온 순간이었다.
그랬더니 질문을 한 당사자는 즐겁게 얘기 나누던 표정을 진지하게 확 바꾸더니, ‘Don’t say like that’라고 바로 일침을 날리셨다. 그리고서는 가정주부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대단한 일인지 길게 열변을 토하셨다. 그분의 따뜻한 말씀들이 맘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한편, ‘주부’라는 직업에 대해 간과했던 내가 부끄러워진 순간이었다.
미국이 오고 얼마 후 어느 날인가부터 나는 마음을 다시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한) 내가 지금 나의 삶이 아닌 다른 곳에 집중을 하면 할수록 눈앞에 놓인 일상마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되는 상황에 마주했기 때문이다. ‘웅이는 일을 하느라 바쁘니, 나는 웅 주부의 역할을 할 거면 아주 제.대.로 해보자고!’ 다짐했다.
제대로 된 역할의 주부란 무엇일까? 주부란 ‘한 가정의 살림살이을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이라는 국어사전의 의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큰 틀에서 보면 주부의 가장 큰 역할은 ‘한 가정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주체들에게 있어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적 생활환경을 잘 꾸려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끗하고 쾌적한 옷을 언제든 필요할 때 입을 수 있게끔 세탁이 잘 되어 있어야 하고, 설거지는 밀려 있지 않으며 세끼의 영양가 있는 식사를 제때 먹을 수 있게 준비하는 것, 집안 곳곳 먼지가 쌓이기 않게 규칙적으로 청소와 정리 정돈을 해두는 것. 떨어지는 음식과 생활용품이 있으면 미리미리 장을 봐두거나 구매해 두는 것 등,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들- 먹고, 자고, 휴식하고, 일하는 데 있어 불편함 없이 잘 살아갈 수 있게끔 살림의 퍼즐조각을 맞춰가는 일련의 과정들이 필요하다.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실제로 이런 행동들을 깔끔하게 잘 수행해 나간다는 것은, 그것도 ‘꾸준히’ 잘 해내간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순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 미국에 와서 직업적 타이틀을 잃었다고 생각한 나는 주눅 들어 있었다.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나의 지금까지의 인생 여정에 비춰 생각해 보면 나는 전자인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통해서’ 보다는 후자인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겪어온 편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 연장선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비롯해, 낯선 사람으로 시작해 현재는 인생이 짝꿍이 되어버린 웅이를 만난 것 역시 내 삶의 가장 큰 분기점이 된 것처럼 말이다.
낯선 환경인 미국에서의 가정 주부라는 경험이 세월이 흘러 내 인생에 어떤 발자취를 남길지는 미궁이지만, 오늘도 열심히 우리 가정의 건강하고 맛있는 밥, 쾌적한 옷, 그리고 깨끗한 집안을 위해 발걸음을 세차게 움직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