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는 네가 'T'라서가 아니야
그날은 그냥, 좀 답답한 마음이 들었을 뿐이었다.
누군가한테 털어놓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말이라는 걸 입 밖에 꺼내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누군가랑 제대로 마주 앉아 있었고,
대화라는 걸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꺼낸 이야기였다.
뭐, 특별한 얘기도 아니었다.
그냥 최근에 겪은 일 중 하나.
누구한테도 해결을 바란 건 아니고,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흘려보내고 싶었다.
근데 돌아온 말이,
“근데...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해?”였다.
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별뜻 없이 한 말이었는데,
별뜻이 없어 보이진 않았나 보다.
그 말엔 짜증도, 불쾌함도 섞여 있었고
아마 ‘지금 나랑 꼭 그 얘기하고 싶은 거야?’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닌데?’
그런 마음도 있었을 거다.
나는 그냥,
그 사람이라면 가볍게라도 듣고 흘려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말의 무게를 자기 어깨 위에 올려놓은 채
“이게 왜 내 몫이지?”라고 반응했다.
그 후론, 대화가 끊겼다.
굳이 싸우거나 언성을 높인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은 핸드폰을 더 자주 들여다봤고
나는 물을 더 많이 마셨다.
어색한 정적이 길어질 때,
나는 한 번 더 입을 열어보려다
그냥 접었다.
아, 말이라는 게 참 어렵다고 생각했다.
무거워도 문제고, 가벼워도 문제고.
내가 꺼낸 말은
어쩌면 대화라기보다 관계에 대한 탐색 같은 거였는데
그 사람은 그걸 책임처럼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날 이후로,
말을 꺼내기 전에 마음속으로 한 번 더 묻는다.
‘이 얘기, 굳이 지금 해야 하나?’
‘이 사람한테 해도 될까?’
그런 질문이 쌓이다 보니,
이젠 아무 얘기도 안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게
조금은 나를 지우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말을 조심하게 만들까.
누군가가 꺼낸 한 마디를
그저 있는 그대로 듣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해?”라는 질문 속에는
많은 전제가 들어 있다.
‘그 얘기는 별로야’, ‘나한테 할 얘기는 아니야’,
‘너는 지금 괜히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부담이 된 기분을 느낀다.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
요즘은 조금 다르게 들린다.
나는 말보단
들어주는 사람이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라서.
내가 꺼낸 말을 재단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
가끔은 웃고,
가끔은 “음” 하고 넘겨도 되는 사람.
그런 관계 하나 있으면,
굳이 말 잘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말을 잘 못했더라도,
그 사람이 내 진심까지 의심하진 않을 거라는 믿음.
요즘 내가 바라는 건, 그 정도다.
오늘도 무슨 말은 하고 싶었는데
또 그냥 안 했다.
사람이랑 말이,
같은 방향으로 가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와 마주 앉아서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해?”가 아니라
“그래서 너는 어떻게 느꼈어?”라고 묻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 말 하나면,
다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