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피톨 언덕의 모던한 다른 건축물들 가운데 보자르 양식의 고풍스런 파사드가 눈에 쏙 들어오니 말이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으로 유명한 파리의 가르니에 오페라극장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외관은 그보다 더 심플하지만, 매스는 육중하다.
첫인상으로 시각적인 리듬감을 불러일으키는 기둥과 창문의 배열에서 경쾌한 화음이 느껴지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사이로 숨겨진 변주가 튀어나올 땐 절로 움찔하게 된다. 바로 1층 창문 위에 올려진 사람의 머리 때문이다. 서로 다른 표정과 골격의 두상들이 어울리지 않게 고풍스런 건물의 주변을 빙 둘렀다. 공교롭게도 모두 33개다. 순간 우스꽝스런 표정의 괴이한 머리 조각상들이 ‘빛의 우물’을 에워싸고 있던 런던의 템플처치가 스쳐 지나간다.
괴테와 에머슨 같은 9명의 인물 흉상을 2층의 기둥 사이에서 봤다면 그 아래가 메인 입구다. 긴장할 필요 없다. 입장은 자유다. 유명한 관광지라 내부에서 길을 잃고 헤매도 괜찮다. (사실 헤맬 수 없을 만큼 공간의 시퀀스는 무지하게 간단하다)
그러다 문득 빛나는 횃불을 높이 쳐들고 있는 두 여신을 마주하게 된다면 계몽의 길에 제대로 들어온 것이 맞다. 바닥에 박힌 빛나는 태양 안에 그려진 ‘계몽의 샛별’이 다시 한번 이정표가 되어준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바닥과 같은 패턴의 태양이 그려진 여섯 개의 정사각형 스테인드글라스 천창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서 뿜어내는 은은한 빛에 온통 황금빛이 된 공간은 보기만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조각과 모자이크로 가득 채워진 벽면과 천장은 단테와 호머같은 인류의 지성들을 기념하고, 그 아래로 쌍을 이룬 기둥들 사이에 수학과 물리학, 화학과 지질학과 같은 학문을 관장하는 여신들이 자리한다. 벽면과 만나는 천장의 모서리에는 솔로몬 신전에 있었을 법한 케루빔 한쌍이 학문과 (계몽을 상징하는) 횃불을 보호한다. 그러고보니 이 횃불을 밖에서도 봤다. ‘지식의 횃불(Flame of Knowledge)’로 명명된 조형물은 건축물의 가장 높은 돔 꼭대기에서 마치 올림픽 성화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제 횃불을 든 두 명의 여신을 양옆에 두고 성소를 향해 조심스레 한 발 내딛어 본다. 먼저 반기는 건 세 개의 아치가 우아한 개선문이다. 성역을 표시하는 일종의 출입문인 셈이다. 여기를 곧장 통과하면 잠시 낮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드디어 성소와 만나게 된다.
그렇게 높이가 50m에 육박하는 거대 공간이 짠~하고 등장할 때에는 일순간 숨이 턱 막히고 만다. 아름다우면서도 장엄하다. 돔을 받치고 있는 여덟 개의 아치형 측창에서 투사된 빛이 묵직한 붉은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공간은 신성함으로 물든다. 빛에 둘러싸여 그림자조차 허용되지 않는 성소는 숨 쉬는 것마저 알아서 조신하게 만든다.
인류의 역사에서 문학과 예술 등 각 분야 최고를 이룬 열여섯 명의 성인이 내려다보고 있는 내부는 8개의 기둥이 정확히 정팔각형을 만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2개 층으로 이루어진 아치로 지탱하는 가벽이 정팔각형의 각 변을 이룬다.
돔 아래 여덟 개의 기둥과 아치형 가벽으로 이루어진 정팔각형이라......! 가만, 이 익숙한 느낌은 뭐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낯익은 공간이 가리키는 곳을 찾아 난 이번 여행에서 만난 수많은 장소들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곳을 떠올렸다. 구약시대 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곳......그 위에서 아홉 명의 십자군 기사들이 칼을 맞대고 템플기사단의 출발을 알린 곳......템플기사단의 보물과 성배의 전설이 시작되었던 곳......그곳은 최초의 템플기사단 본부였고, 지금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이슬람 건축물이기도 하다. 바로 예루살렘 템플마운트에 있는 ‘바위위의 돔’ 사원이다!
‘바위위의 돔’ 사원 내부를 그대로 빼다박은 듯 재현한 이곳의 명칭은 ‘중앙 열람실(main reading room)’이다.
그렇다. 여기는 도서관이고, 이 팔각형의 성소가 자리한 곳은 미국 의회 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이다. 토머스 제퍼슨으로부터 기증받은 도서에서 시작해 현재는 470개의 언어로 된 3,900만여 점의 도서를 포함한 총 1억 7000만 점의 자료가 소장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다.
중앙열람실의 정중앙에는 역시 ‘바위위의 돔’ 사원과 같이 원형으로 된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전문적인 사서들이 그 많은 소장 자료들을 관리하고 연구자들에게 제공하는 곳이다. 한마디로 도서관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집중된 핵 중의 핵인 셈이다. ‘바위위의 돔’ 사원이 아브라함의 역사적인 바위 위에 세워졌다면, ‘미국 의회도서관’은 인류가 이룩한 귀중한 지식을 중심에 두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이 쏘아올린 새로운 시대를 유지하고 만들어갈 ‘신세계 기사단’의 본부가 바로 도서관이라니, 얼마나 멋진가! 기사로 입문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자, 기사가 된 후에는 목숨을 걸고 수호해야 하는 보물은 바로 ‘지식’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중세까지 ‘지식’은 곧 ‘권력’이었다. 그렇기에 ‘권력’은 ‘지식’을 감추려는 자들에 의해 독점되어왔다. 고대 이집트의 왕족들과 신관들은 그들의 비의를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히에로글리프(상형문자)를 이용해 전승했고, 중세시대 성서는 이미 죽은 언어였던 라틴어로만 기록하도록 했다. 같은 이유로 ‘권력’에 방해되는 ‘지식’은 없애고 싶었을 게다. 그렇게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무너져내렸고, 진시황과 나치는 책을 불살랐다.
‘권력’의 입맛에 맞게 선택된 지식은 왜곡될 게 뻔했다. 로마 황제 세력이 신약성경에 포함될 27개 경전을 선별하는 순간, 나머지 경전들은 모두 ‘이단’이라는 낙인과 함께 파쇄된다. (그중 일부가 구사일생으로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심지어 예수의 찐제자들이 작성한 경전들까지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으니, 이쯤 되면 황제의 ‘선택적 신앙’에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현세대의 사람들이 신의 이름으로 혹은 선한 의지로 철썩같이 믿고 따르는 지식이 여전히 ‘천동설’이 아니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통찰했던 것처럼, ‘신에 대한 경외감’이 불안과 어둠으로만 받쳐질 수 있다고 믿는 자들에겐 세상에 ‘웃음’이 퍼지는 걸 막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착각할 수도 있겠다.
감추려는 자들이 있으면, 그걸 찾으려는 자들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감추려는 자들은 자신들이 선별해 보여주는 지식만 믿게 하고 싶겠지만 역사는 그게 영원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왜냐면 믿음만으로는 감당되지 않을 만큼 지식에 대한 열망이 큰 자들이 우리들 가운데 몇몇은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감추려는 자들이 내세우는 지식 앞에서 그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기존에 세팅된 권력에 위태로운 균열이 시작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현실이라고 알고 있는 세계가 사실은 조종당하고 있는 가상공간이라는 걸 알아차리며 꿈에서 깬 인간들이 두 번 다시 가상세계에 속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선택된 지식으로 만들어진 현실세계와 영화 속 가상세계가 별반 다를 것도 없어 보이긴 하다!)
이제 감추려는 자들에겐 ‘음모론’으로 치부되겠지만, 찾으려는 자들에겐 감춰진 지식을 찾는 흥미진진한 게임이 시작된다. 그 게임에서 가장 많이 소환되는 주인공이 바로 템플기사단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템플마운트에서 무엇을 찾았는지 여전히 미스터리다. 일부의 주장처럼, 발견한 게 하나도 없고, 뜬소문만 부풀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존재 의미가 깎이는 건 아니다.
그들로부터 시작된 성배 전설에는 왕정과 교황의 지배권력이 ‘진짜 지식’을 감추고 있다는 당시 사람들의 의구심이 반영된 거니까.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어쩌면 그때부터 중세시대는 해체를 밟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템플기사단이 진짜 쥐뿔도 없으면서 허세만 쩔은 사기 캐릭터에 불과했던 걸까?
템플기사단이 남긴 건축물과 흔적을 쫓아 예루살렘에서 워싱턴DC까지 오면서 분명 그 안에 숨겨진 뭔가가 더 있을거라는 확신만 점점 커져갔다. 기사단 결성 이후 기사들의 영지인 남프랑스에 널리 퍼진 예사롭지 않은 영성의 흐름은 시작에 불과했다. 탄압을 받은 후 생존을 위해 기사단의 명칭이 바뀌고 지하로 숨어드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고딕건축, 대항해시대, 산업혁명, 계몽주의 그리고 미국 독립에 이르기까지 늘 인류역사를 변혁시킨 사건들 한 가운데에서 우연찮게 그들과 조우하게 되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 변혁의 원동력이 된 놀라운 기술적 성취와 정신적 각성에는 분명 예전과는 다른 '지식'이 스며들어 있음을 직감한다.
기실, 그들이 가진 힘의 원천이 ‘성배’에서 나오는 거라면, 혹여 그게 진짜로 실제하는 거라면, 그 ‘성배’는 그들이 다시 찾아낸 ‘지식’이 아닐까 한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전승해 온 그 ‘성배’가 마침내 세상을 뒤집고 만인 앞에 장엄하게 드러낸 위용이라니......! 극강의 짜릿함이 나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성배’가 숨겨졌다고 알려진 바위가 지식의 저장고로 번안된 새로운 세상의 성전을 나는 홀린 듯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이번 화가 마지막 글입니다. 글이 괜찮았다면 '구독하기'와 '좋아요'를 꾹~눌러주세요~!)
*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과 장소, 사건은 모두 실존하고 실재하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려둡니다.
사진8-64: By Carol M. Highsmith - This image is available from the United States Library of Congress's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under the digital ID highsm.11604.This tag does not indicate the copyright status of the attached work. A normal copyright tag is still required. See Commons:Licensing.,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5709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