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저울질은 필요 없다.
힘든 일이 생기면 자연스레 타인에게 걱정을 털어두곤 한다.
“나 요즘 너무 힘들어. 우울해.”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대게
“무슨 일이야. 괜찮아?” 라며 걱정하고 공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누군가의 감정에 귀 기울이는 것, 그 자체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기에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공감”의 표현 대신, 일종의 “비교” 표현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 정도 가지고 왜 그래?” 라던가, “내가 겪은 거에 비하면~” 처럼 말이다.
마치 누가 더 무거운 족쇄를 차고 살아가는지를 겨루기라도 하듯, 고통을 나누는 자리는 어느새 감정의
경중(輕重)을 따지는 토론장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누구의 삶이 더 힘들고, 어떤 상처가 더 깊고 쓰라린지를 비교하는
'저울질'과 '우울에 순위를 매기는' 풍경에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사람은 각자 다른 감정의 역치를 지니고 있다.
이미 너무 많은 고통에 익숙해져 감정에 무뎌진 이가 있는가 하면, 작은 상처에도 쉽게 무너지는 이 또한 존재한다.
같은 고통일지라도 그것을 견디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고통에 더 민감한지도 그 사람의 삶의 맥락과 환경에 따라 모두 제각각이다.
즉, 모든 고통은 절대적아지 않다.
누군가에겐 경제적인 어려움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실연의 아픔이
인생에서 감당할 수 없는 쓰라린 상처일지도 모른다.
어떤 고통도 '이건 별거 아니야'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고통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언제나 주관적인 '체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의 고통을 저울질하려 든다.
타인의 속앓이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꺼내 들며,
“난 이만큼이나 아픈데, 너는 왜 그 정도로 힘들어하느냐" 라고 묻는다.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타인의 감정 역치는 '낮다'고 여기며 내가 느끼는 고통은 당연히 '크다'고 믿는 것.
역설적이게도, 감정의 역치가 주관적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자기중심적 판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의 비교가 단순히 '공감'을 저해하는 수준을 넘어, 상대가 마음을 열 용기 자체를 꺾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고작 그 정도로 유난이야."
이런 말 한마디는 사소해 보일지 모르나, 당사자에게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부정당했다는 신호로 작용하여
결국 더 깊은 고립감과 침묵을 유발한다.
정서적 고통에 있어 '정도'는 타인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도 말이다.
우울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서로의 고통을 비교하는 의미 없는 저울질을 멈추려 들지 않는다.
마치 내가 더 불행함을 입증해야 속이 시원하듯이 말이다.
고통이 경쟁의 도구로 자리 잡은 지금,
의미 없는 족쇄 자랑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요즘 애들은 유난이다."
"그 정도도 못 버티냐"
이처럼 타인의 고통을 평가하고 단정하는 말들 속에서,
우리는 정작 중요한 하나의 가치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공감[共感]"이다.
내가 겪지 않은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누군가에겐 얼마나 아프고 벅찬 일이었음을 이해하려는 태도,
때론 판단보다 더 깊은 이해를 만들어내는 방식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존중'이자,
타인의 감정에 다가설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식이다.
감정을 받아들이는 역치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고통을 저울질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닫는 것.
그리고 '서로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
그 태도야 말로, 이 삭막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가장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