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혼일기 (15)

답변서

by 도미니


기일이 잡혔다는 문자를 받고 며칠이 지났다. 특별히 변호사에게서는 연락도 없어서 엉 어떡해야하는 거지....? 하며 지내다가 기일 일주일 전에야 전화를 해볼 여유가 생겼다.


저 뭐 특별히 준비할 일은 없을까요...?

변호사 말로는 상대방이 지금 답변서 조차 안내고 있어서 특별히 방어할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기일 전날 오전 10시에 통화를 더 하자고 아마 기일 직전까지는 답변서를 낼 것이란 이야기.

뭔가 해야할 것 같지만 안해도 된다는 것은 일단 두려운 와중에 너무 다행스런 일이므로 정말 일단은 마음에서 소송을 기분 좋게 밀어내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여느 때처럼 동료들과 즐겁게 떠드며 웃고 돌아와 보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상대방의 답변서를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드디어 걱정하던 순간이 온 것이다. 생살을 가르고 후벼파는 것 같을 고통이 바로 눈 앞에 와 있었다. 사실 그도 소장을 받았을 때 그랬을 것이고, 이 전쟁은 내가 먼저 시작한 것이라 마냥 억울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렇지 않다. 난 결혼생활 내내 정말 참고 이겨내려고 그를 이해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이제 객관적인 시각보다 내가 나를 보호하고 합리화하고 편을 들어줘야 한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떳떳하게, 싸워야 한다.

-------

남은 점심시간에 메일을 열어보고 한동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예상했음에도 마음 속에서 넘쳐나는 분노는 내 기대와 상상을 넘어섰다. 30장이 넘는 답변서는 왜곡과 거짓말로 가득했다. 아니 정말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정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에서부터 와... 어떻게 이런 거짓말까지 쓸 수가 있지...?

숨이 막혀 미처 끝까지 읽어볼 수도 없었다. 내가 너무 점잖았구나.. 내 소장은 고작 5장이다. 양심에 찔려서 없는 이야기는 지어내지도 못했고, 판사가 읽기 지겨울까봐 겪은 일의 10분의 1밖에 적지 못했다. 내가 너무 단순하고 신사적이었구나...

막심한 후회와 공포가 한꺼번에 덮쳤다. 이일을 도대체 몇번이나 더 겪어야 하는 걸까. 정말 괜히 시작한 걸까. 도대체 내가 보낸 소장을 보고 얼마나 아팠으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악독해질 수가 있는 거지. 쓸데없는 양심에 그것을 생각하면 또 마음이 아팠다. 우리 아기는 이렇게 악독하게 싸우는 부모 밑에서 제대로 자랄 수 있는 걸까. 정말 부끄럽다. 잘잘못을 떠나서 그냥 아기에게 너무 미안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내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인 걸.. 뭐 하나 꾸며낸 게 없었어. 그걸 주장하지 않고는 난 살 수가 없었는데.. 도대체 몇개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태어났을까. 억울함과 분노를 넘어 마주치는 말도 안되는 여러가지 감정들도 감당이 어려웠다. 아무튼 40년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상황이다. 정말 정말 고통스럽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 떨리는 손으로 변호사의 번호를 눌렀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기일까지 다시 반박을 해야하는 걸까. 그럼 일주일도 안남았는데 그 때까지 답변을 쓸 수나 있을까. 당장 오늘은, 회사에 어떻게 계속 앉아 있지... 조퇴를 할까. 근데 조퇴를 하면, 조퇴를 하면 어디에서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울리는 신호음을 들리며, 매끄럽게 마감된 벽으로 둘러쌓인 방에 갇힌 것 같은 느낌. 그저 어디에 뛰어들어 죽어야만 끝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며.


주여. 주여.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제가.. 자신에게 자신의 명의일뿐 어머님 소유인 부동산에 대한 명의이전을 근 한달 간 집요하게 요구하며 괴롭혔다는 이야기.. 자신이 매형의 회사에서 잡무를 처리하며 가장으로서 힘들게 버텼다는.

굴뚝없는 연기같은 거짓말이 적혀 있었어요. 저는 그 부동산은 한번 보기만 했고, 매형의 회사는 페이퍼컴퍼니거든요. ^^

지금은 이렇게 비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왜 그 때는 그렇게 화가 났었는 지, 왜 그렇게 충격을 받았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마 이렇기에 다들 진흙탕싸움이라고 했구나. 또 그 때서야 절감했어요

한동안. 정말 한동안. 그가 죽어 없어지길 바랐었습니다.



keyword
이전 14화이혼일기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