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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일기 (14)

기일이 잡히다

by 도미니



조정명령 신청서는 수기작성이 원칙인 듯 하다. 하긴 지난번에도 한글파일이 아니라 양식을 스캔한 것을 변호사가 보내줘서, 출력해서 손으로 꾹꾹 눌러썼다.


초안을 잡았어도 막상 글로 쓰면 또 다르다. 분량의 조절이 어렵고, 문장을 매끄럽게 하다 보면 넘치기도 모자라기도 한다. 그래도 이건 넣어야 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살짝씩 넣고 나니 줄이 많이 부족해서 결국은 용두사미로 글이 끝났다. 소장과 함께 읽을테니 되도록 소장에 쓴 내용을 제외하고 다른 내용으로 채웠다.


감성과 사실. 두가지 중에 하나를 컨셉으로 잡아 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장은 되도록 사실 위주로, 조정 신청서는 감정적인 흐름을 중요시해서... 썼다. 사실 결과는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읽는 상대방을 생각하며 써야하는 것은 확실하다. 내 이야기를 '전달' 해야한다. 그나마 남편보다는 좀 더 내 입장을 헤아려 주겠지... 하는 작은 가닥을 잡고 캄캄하지만 어쨌든 발을 떼어 보는 것이다.


나는 화내기가 어려워서 화를 잘 안내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화내고 나서 수습해야하는 일들부터 생각이 나서, 화 내는 타이밍을 언제나 놓치고 분해하는 타입이다. 욱해서 화내는 일은 거의 없다. 종종 피가 거꾸로 솟는 듯이 분노가 치미는 적이 있어도 확 뱉어버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남편과 이야기할 때는 정말 화가 많이 났다. 연애할 때는 사실 남편에게 큰 기대나 관심이 없어 싸운 적이 몇번 없는데. 한두번 기억이 난다. 사람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일 수도 있구나 싶어 혼자 발을 쾅쾅 굴렀다. 정말정말 답답했었다. 이런 당연한 상식을 내가 지금 설명해야하는데, 설명하기에 난 너무 지쳤고. 기운이 없고. 또 다른 일을 해야한다. 정말 너무너무 싫었었다.


결혼준비부터 사사건건 그런 일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올해 초 사건이 있은 후부터 말을 안해버리니 정말 편했다. 대화욕구가 없는 편이 아닌데도 남편의 쓸데없는 정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 편했고,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편했다. 둘이 맞춰 살고 어쩌고는. 정말 이제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 정말 이제 그만하자.


조정신청서를 이대로 보낼까 말까 고민하며 또 가슴이 미어진다. 내 속상함을 표현하기에 지면은 너무 좁고, 억울함을 전하려고 궁리를 하기에 내 멘탈은 너무 약해서 지레 부서지고 만다. 찢겨지고 망가진 마음을 질질 끌고 또 앞으로 나가야 하는 현실은 참 버겁고 답답했다. 한참을 가슴을 잡고 괴로워하는 데 문자가 왔다 이번엔 또 뭘까.. 한숨을 쉬며 열어본 낸용은 뜻 밖에도.


기일이 잡혔다는 것이다.


앞으로 또 3주 뒤. 하도 연락이 없길래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소제기 후 꼭 5달이 되는 날 기일이 잡혔다고 한다. 첫 기일.


임시양육자 지정만 받을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이고 안심이다. 할 수 있다. 생각치도 못한 소식에 다소 에너지가 생겨서 일단 조정신청서를 메일로 보냈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자. 할 수 있는 일만 할 수 있는 정도로 하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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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호흡으로 가져가는 일은 무엇이든 어렵습니다. 길고 긴 여정 중에 예상치 못한 흐름이 생기기 때문이겠지요. 처음에 생각한 마음들은 어느새 잊혀지고 또 새로운 마음과 상황들이 생겨납니다. 당황하지 않고 대응해야 하는 것이 참 어려울 때가 많아요.


하지만, 내가 어려운 만큼 상대도 똑같이 어려울 테니까.


제가 저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은 비록 실패했지만, 끝까지 상대에게는 괜찮은 듯 웃어보일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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