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서 송달 후 2주가 지났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지 않아도 하루하루를 눈으로 압인을 찍듯이 기다려서 2주가 지난 바로 다음날 점심시간이 지나자마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님 송달되고 2주 정도 지나면 할 수 있다고 하셨죠.. 빨리 기일지정신청해주세요.."
변호사는 서류를 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더니 5분도 안되어 기일지정 신청을 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그냥, 기다리면 안되는 일이 소송이다. 변호사는 필요한 절차들을 손쉽게 처리해줄 뿐 일정은 내가 챙겨야 한다. 오늘이 소 제기 후 몇일이나 지났더라.. 따져보니 82일째였다.
3달도 안되는 시간동안 나는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정말 정말로 이렇게 남편이라는 존재없이 잘 살다가 잘 죽을 수 있을까. 우리 아기는 아빠와 엄마가 따로 있는 집에서 잘 자라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드라마 대사처럼 정말 이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은 소송관련 이슈가 생길 때마다 늘 든다. 감사하게도 생각에서 나오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여파도 훨씬 적어서 표정관리도 어렵지 않다.
변호사 말로는 남편은 변호인 선임도 하지 않았고 간이답변서만 제출했다고 한다. 그게 뭐냐고 물으니 원고의 청구를 기각해달라는 문구만 적힌 서면이다. 듣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보니 사태가 짐작이 갔다. 그는 어머님께 아직 지금의 상황을 오픈하지 않은 것 같다. 수중에 목돈이 없으니 변호사를 혼자 선임할 수는 없고, 어머님께 부탁을 드려야 하는데. 그건 또 챙피하고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홀로 소송을 택했겠지. 사실 양육권을 못 가져간다는 것도 알 것이고, 그다지 승산이 있지 않은 소송이니 변호사를 선임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더 불합리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렇게 퍼부었었구나. 이혼을 원하는 것은 나와 내 변호사 밖에 없다고. 우리 가정을 이렇게 만들고 자신과 아기를 갈라놓은 것은 너라고 그런 이유가 또 이런 상황 때문이었구나.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생각과 안일하고 이기적인 자세로 결혼이란 일을 벌여서, 그 와중에 본인이 사랑한다고 했던 여자가 상처 받았는 지는 워낙 관심이 없다. 그 자신도 아니고 자신의 어머니의 손주를 낳아줄 여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객체 취급을 받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 일인지, 모든 일에서 집안의 주인공으로 득의양양했던 그로서는 모를 수 밖에 없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고 하니 솔직히 마음이 좀 놓였다. 나는 양육권만 가져오면 되는데, 상대방의 태도가 나보다 소극적이라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근데 그럼 도대체 첫 기일은 언제 잡히는 걸까... 기다리고 기다려서 한달만에 다시 받은 연락은. 기일통지가 아니라 보정명령을 이행하라는 메일이었다.
법원에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기일지정신청을 해놓긴 했지만 한달이 넘게 소송절차를 잊고 살았다. 새로 해야하는 일과 인간관계에 밀려 이혼과 소송은 후순위가 되고, 나는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혼자였던 것처럼 익숙하게 살았는데, 보정명령 메일을 보냈다는 변호사의 문자를 받자 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필 평소에는 있지도 않던 업무가 생겨서 앞 옆의 직원 분들이 관련 이야기를 쏟아내는 타이밍이었다. 문자를 확인하고 정신이 나갈 것 같은데, 업무 이야기까지 듣느라 다리도 마음도 동시에 휘청거렸다. 간신히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밖으로 나갔다.
법원에서 하는 "보정"이라는 말은 무엇을 고치라는 것이 아니라 추가서류를 내라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소제기 초창기에도 보정명령이라는 명목으로 유튜브에서 이혼 후 양육에 관한 영상을 보고 소감문을 써내는 절차가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보정명령이란 것은 조정을 위한 기초조사서를 작성하여 3주후까지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앞의 3장은 기본정보와 양육상황 재산상황 기타 로 나누어진다.
기본정보에는 이전에 이혼관련 절차를 밟은 경험이 있는지, 혼인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유 나 폭력행사 우려 등에 관한 사항이 있고
양육사항에는 아이가 누구와 있는지,
재산상황은 위자료나 재산분할과 생활비에 대한 합의 여부를 묻는다.
기타로 법원의 임시조치 등 요구할 것이 있는 지 묻는 란이 있었다,
체크는 어렵지 않았다. 복수응답도 가능해서 마음가는대로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아 괜찮네. 별 거 아니네. 괜히 긴장했네.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내 억울함이 전달되다니 허탈하다.. 할 즈음. 마지막으로 판사나 조정위원에게 전달되기 바라는 것을 적어보라는 a4용지 한장 분량의 공간이 나왔다. 잘됐다. 남은 감정 다 풀어놓을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과 동시에, 여기에 과연 모두 쏟아놓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밀려왔다. 3주... 3주간 열심히 써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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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라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머리 뒤편으로 밀어놓았던 이야기를 다시, 다시 펼쳐내야 했다. 이야기는 고사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밀어뒀던 경험들을 다시 소환하고, 아주 지겹게도 그 중에 적절한 것을 적절한 단어를 골라 글로 써야한다. 그저 내 속상함을 카페에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상처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사건 위주로 쓰자니 너무 주절거리는 듯해서 나조차 읽기가 싫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감정의 스토리 위주로 가자니 근거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내 지난 시간들을 담아내기에 종이 한장은 너무 적다. 얻어맞은 것도 아니고 외도를 한 것도 아니어서 뚜렷한 증거가 있는 큰 사건이 없는 그야말로 성격차이 이혼이다 보니... 무슨 이야기를 쓰고, 어떤 이야기를 덜어내야 할까. 어떻게 시작해야할까. 어떤 컨셉을 잡아야 할까.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악몽의 뫼비우스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하루종일 그 생각을 하다보니, 간신히 빠져나온 듯한 지옥으로 다시 굴러내려간 느낌이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라 방법이 없었다. 하루면 다 쓸 줄 알았던 것을 하루 이틀 미루고 마음의 돌덩이를 얹은 채로 드디어 3주가 다가왔을 즈음 어쩔 수 없이 1시간 일찍 퇴근을 하고 집 근처의 카페에 앉았다. 종이를 내어놓고 또 어떻게 시작해야하는 지 생각을 하다가 눈물이 한방울 뚝 떨어졌다. 따라서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굳이 막고 싶지도 않았다. 보드라운 벨벳거품으로 만든 따뜻한 라떼를 마시고 싶었는데, 형편없는 모양의 거품이 덕지덕지 앉은 라떼가 나온 것도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사람들이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카페 안에서 혼자 엉엉 울어버렸다.
왜, 내가 이런 경험을 해야하는가. 열심히 했는데. 시험도 붙고 싶었지만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려고 애를 애를 썼는데. 이제 그 꿈은 물건너 갔구나. 이건 도대체 누구 탓인건가. 성실했지만 유별난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난 아무와도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 수는 없는 사람이구나. 이제 누구도 만나서 얽히고 싶지 않은데....
근데, 근데 외롭다.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아.
세월에 깎여 남녀관계에 진절머리가 난 나와, 원초적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내가 서로 부딪혀 싸운 결과는 언제나처럼 현실의 압승이었고,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은 진정되고 머릿 속은 정리가 되어 백지에 초안을 잡아 줄줄줄 내려 썼다. 그래 이 정도면 되겠다. 이 정도로 쓰면 될 것 같아.
앞으로 이렇게 혼자 눈물을 훔치고, 울지 않은 척, 아무 일 없는 척. 집으로 들어가는 일을 또 얼마나 더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