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올드보이」라는 작품을 사랑한다. 이우진(유지태 역)의 사랑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추악하고 더러운 사랑마저 이해하게 만드는 작품이라서. 관객들은 누구나 영화의 초반부에 오대수(최민식 역)의 편이겠지만, 영화가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단 한마디 말 때문에 오대수를 15년 동안이나 감금한 이우진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고 관객들이 “아, 근친상간은 나쁜 게 아니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관객들은 여전히 근친상간을 ‘악’으로 규정하면서도, 이우진을 섣불리 ‘악역’으로 규정하지 못한다. 「올드보이」는 이처럼,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게 했다는 데서 성공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줄거리가 뉴스를 통해 알려졌으면 어땠을까? “친누나와 근친상간 한 40대 남성, 15년 동안 동창을 감금해… 범행 동기는 근친상간을 발설했기 때문으로 밝혀져.” 같은 제목으로 말이다. 아마 댓글 창은 이우진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가득 찼을 거고, 더 재치 있고 원색적으로 이우진을 비난하는 댓글이 더 많은 ‘좋아요’를 받아 상단에 배치되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요즘의 인터넷 여론이 그렇다. 사람들은 기사 몇 줄로 남의 ‘줄거리’를 멋대로 재단하고, 한 톨의 잘못을 빌미 삼아 태산 같은 공격을 감행한다. 이런 공격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그동안 참아왔던 공격성의 배출일뿐이다.
이 사람들은, 비난이 훌륭한 자기 방어의 수단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남을 쉽게 비난하는 사람일수록, 그 비난의 요소가 자신에게 잠재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동성애 기질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이 오히려 동성애자를 매우 공격적으로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반동 형성’이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내부의 비난받을만한 자신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남들 앞에 은근히 과시하는 것이다. 자기 내면의 악을 인정하지 못해 외부로 비난의 대상을 옮기는 일은 인류사에서 빈번히 있었던 일로, 그렇게 인류는 악마나 마녀 따위의 허상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누구나 알듯이 처참하다.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상처 주고,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내심 그것이 ‘악’인지도 다 안다. 누구나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간다는 점은 똑같지만,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의 차이는 악을 대하는 태도에서 극명하게 갈리는데, 성숙한 사람은 자기 내부의 악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남의 악을 섣불리 공격하지 않는 반면, 미성숙한 사람은 남의 조그마한 악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시라도 남을 비난하지 않으면, 자기 내면의 악과 언제 대면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악행의 자서전’을 쓰지 못한다.
근친상간이라는 ‘절대 악’을 다룬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이 영화의 말미에 친누나의 손을 놓아 다리 밑으로 빠뜨린 이우진을 보면, 나 또한 누군가의 손을 놓아 상처 준 일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나는, 악역 이우진을 사랑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