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새벽 5시, 나는 운전 중이었다. 이전에 몇 번이나 떨어졌던 영어 시험이 또 있는 날이어서, 회사에서 이를 배려해 주어 일찍 퇴근하는 길이었다. 주황색 빛으로 가득한, 어둡고 조용한 도로를 따라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던 중 체리필터의 「오리 날다」가 나왔다. 오랜만에 듣는 곡이었다. 어릴 때는 그저 신나는 곡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어 들으니 아니었다. 빨간불이 차를 멈춰 세웠을 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오리라는 이유로 나를 멈춰 세우고,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문과, 비서울권 대학 출신, 넉넉하지 못한 형편, 조금씩 늘어가는 나이 같은 것들이 나를 오리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나의 학부 시절 지도교수님은 나에게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물리학을 복수 전공한다고 했을 때 인문대생이 뭘 그런 걸 하냐고 못 한다고 하셨고, 과 사무실에서 혼자 철학 강의록을 짜고 있을 때면 못마땅한 눈빛으로 너무 공부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하셨다. 방학 때 혼자 논리학 전공 서적을 읽고 질문을 모아 연구실에 찾아가면 연구실은 항상 비어있었고, 어쩌다 퇴근하는 교수님을 잡아 질문을 하려고 해도 지금은 바쁘다며 다음에, 또 다음에 하자고 하셨다.
앞으로 학계에 남아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에 집안의 형편을 물으셨고, 교수가 되려면 유학을 가야 한다고 하셨다. 물론 그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나에게는 그 말이 유학을 가라는 말보다 당장 학업을 그만두라는 말로 들렸다. 유학 갈 형편이 안 되는데 그래도 공부는 계속하고 싶다고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말을 많이 들으며 살아와서 그때는 별로 상처를 받지 않았다. 그것이 상처가 된 건, 4~5년이 지나서 이십 대 끝자락에 섰을 때 정말 원하는 게 아무것도 안 이루어질 때였다. 남들은 6개월이면 통과한다는 영어 시험을 8~9개월째 붙들고 있을 때, 하루에 서너 시간씩 단어를 외우고 문제를 풀어도 점수의 향상이 전혀 없을 때, 내가 지원하고자 하는 서울대가, 타교와의 차별이 심해서 내 출신으로는 아무리 공부해도 입학하지 못한다는 말들이 들릴 때였다. 내가 그동안 무시해 왔던 나의 한계에 대한 말들이 사실은 현실적인 조언이 아니었을까.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데, 나는 이를 무시하고 희망찬 말들만 받아들이며 몽상 속에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결국, 그들이 이겼고 나는 패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천천히 나를 잠식해 왔다.
그런 우울감의 수위가 점점 차올라 목까지 잠겼을 때, 나를 뭍으로 꺼내어 준 건 내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철학이나 학문과는 별 관련이 없는 사람들, 내 학업적 진로나 꿈, 계획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무엇에 잠겨있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내 손을 잡고 위로 끌어당겨 주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잘 될 거라고 하는 응원, 혹시 도와줄 게 없냐고 묻는 물음, 글을 잘 보고 있다는 짧은 칭찬이 나를 조금씩 더 버티게 해 주었다.
이번 합격이 그다지 대단한 성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다시 가난한 학생이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출신이나 형편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겁먹었던 것들과 정면으로 마주했고, 싸웠고, 결국 그 도전이 옳았음을 알게 됐다. 나는 그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이번의 성공이 앞으로의 모든 도전에 대한 성공을 보장해 주진 않겠지만, 부딪혀보지 않고 미리 두려워하는 나쁜 습관은 조금 줄일 수 있게 됐다.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에게 그런 용기를 나누어 주고 싶다. 부딪혀보지 않고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는 일, 자신을 비하함으로써 자기 약점과의 대면을 피하는 일, 모두를 깎아내리면서 자신의 무능과 나태를 정당화하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안 이루어지게 한다. 미리 걱정하고 행동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미리 행동하고 걱정을 미루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
나의 겨울이 끝나간다. 그 긴 시간 동안 내 곁을 지켜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