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처럼 퍼지는 사랑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스포일러 주의
1.
사랑은 겨울날의 들불처럼 빠르고 위험하게 퍼지기도 한다. 영화의 전개를 위해서였는지, 사랑의 부도덕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한나와 마이클의 사랑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급하고 개연성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랑도 분명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오히려 영화에 깊이 빠져들 수 있다. 단순한 몸짓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나는 아주 슬프게 바라보았다.
2.
사랑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다. 만나고, 설레고, 용기를 내고, 사랑하고,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 싸우고, 결국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수순으로. 이 중 어떠한 것을 건너뛰면 사랑을 잘 마무리 짓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여러 작품에서는 영원한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 두 주인공이 한창 사랑할 때 죽음이나 질병, 가족의 반대 같은 이유를 들어 사랑이 식어가는 과정을 생략시키고는 하는데, 여기서는 한나의 도주가 그런 역할을 한다. 마이클이 한나를 질려하기 전에 그녀가 돌연 떠났기 때문에, 마이클의 사랑은 40여 년이 지나서도 끝날 수가 없었다.
3.
결국 문맹임을 밝히지 않고 모든 죄를 뒤집어쓰겠다고 결정한 것도 한나 자신이다. 마이클은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법정에 진실을 밝히지도, 수감된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서지도 않는다. 그게 그녀를 위한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글을 모르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 40여 년 전처럼 글을 읽어주는 것이, 그가 택하고 유지해 온 사랑의 방법이었다.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얼마나 될까.
마이클은 왜 40여 년 만에 만난 그녀를 요란하게 안아주지 않았을까. 한나는 왜 끝까지 그런 이기적인 선택을 했을까. 어쩌면 둘 다, 둘의 재회가 오랜 사랑의 끝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