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보는 시선
지금은 만나 뵐 수 없지만, 병원 뒤 산책길을 걸으면 기억나는 환자가 있다.
조금은 굳어 있는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던 환자였다. 봉사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공허한 눈동자에 생기를 불어넣은 건 '산책'이라는 단어였다.
호스피스 봉사 전 아침 브리핑에서 특별 임무를 배정받았다. 환자와 함께 산책을 다녀오라는 것.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간병하는 가족이나 봉사자와 함께 산책하는 환자를 종종 볼 수 있다. 대부분은 거동이 힘든 상황이라 휠체어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라도 병원 주변을 거닐며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다행이다. 휠체어조차 이용하지 못할 땐 병실 침대를 호스피드 병동 복도에 옮겨 두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병실에 들어가 함께 산책할 환자의 준비를 도왔다. 사회복지사와 통합간병인이 산책 준비에 다급해진 환자를 만류했다. 병실 침대 옆 작은 서랍에서 담배 한 갑을 챙겨 넣고는 준비된 휠체어에 툭 하고 앉으셨다. 주렁주렁 열린 링거액들을 휠체어에 옮겨 매달며 말했다. "마음껏 산책하실 거니까, 천천히 가요 우리."
산책이라는 이름 뒤에 조용히 묵인되어 있는 건 '담배'였다. 산책을 나서자 환자의 마음속 조급함은 커져만 갔다. 화장실이 급할 때, 잘 참다가도 마지막에 화장실 문고리 앞에서 자제력을 잃고야 마는 것과 같은 것일까? 모르고 있던 병원의 지름길을 통해 흡연구역에 다다랐다. 손에 들려 있는 라이터의 불이 자꾸 꺼지자 조급함이 더해갔다. 다가가서 불 붙이는 걸 도와드렸고, 조금은 안정된 손짓으로 나를 밀어내셨다.
열 발자국쯤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본인은 흡연하시지만, 행여 담배 연기가 향할까 싶어 나를 자꾸 살피셨다. 우린 서로를 따뜻하게 감시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 같으면 손짓을 하셨고, 내비게이션 삼아 자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흡연 구역에서 불어오는 담배 연기를 피했다.
짧지만 길었던, 충분했지만 아쉬웠던 시간이 끝나자 본격적인 산책이 시작되었다. 병원 한 바퀴를 빙글 돌며 제법 찬 공기를 만끽했다. 가족들이 상주하며 간병하는 게 아니라서, 가족들이 오는 주말을 기다리시거나 봉사자들이 오는 시간을 기다리셨다고 한다.
처음 보는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누비는 휠체어가 불편할 법도 한데, 엄지를 들어 보이셨다. "운전 잘하네."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기 전, 주머니 속에 준비해 두었던 카스테라 과자를 한 봉지 꺼내 드렸다. 사회복지사님이 미리 귀띔해 주셨던 '행복의 킥'이었다. 휠체어를 이용한 거동이 가능하고, 식사도 가능한 환자였기에 간식을 챙겨드릴 수 있었다. 간식을 받아 들고는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으셨다. 간식을 드시느라 분주한 환자 옆에서 나도 똑같이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한 병실로 돌아왔다. 휠체어를 정리하고 환자를 다시 침대에 눕히는 분주한 상황이 이어졌다. 일손을 돕고 있는데 주머니 안으로 푹 하고 들어오는 무언가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주머니에는 달달한 간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싱긋 눈짓을 해 보이는 환자와 은밀하게 신호를 주고받았다. '달달구리 간식! 감사합니다.'
온 우주가 널 도울 거야
말랑카우의 입을 빌려 환자가 메시지를 보낸 것 같았다. 하루종일 주머니에서 부스럭 거리는 말랑카우들이 싫지 않았다. 재잘거리는 간식들을 하나 둘 먹으며 환자를 생각했다.
아이들과 수업하며 칭찬 간식을 주기 때문에, 일상 속에서 달달한 간식을 자주 접한다. 재잘거리는 말랑카우를 보면 그 환자와 조우하는 것 같다.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 뵐 수 있다면 은밀한 거래를 제안하고 싶다.
"함께 산책 나가실래요? 이번엔 더 달달한 카스테라를 준비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