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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지 못한 마지막 수어 인사

손 끝에서 피어난 꽃 - 30대 호스피스 봉사자 이야기

by 미묘


환자에 대한 브리핑으로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한다. 한 주 동안 임종한 환자와 새로 들어온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기존에 계셨던 분들의 컨디션 또한 중요하다. 예측 가능한 임종의 단계를 지나는 분도 계시지만, 하루하루 예측할 수 없는 컨디션의 풍랑 속에서 봉사자와 조우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날의 브리핑에서는 필담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 농인 환자가 유독 기억에 남았다. 농인 관련 단체에서 수어 통역을 해주시는 분이 간병하고 계신다고 했다. 고정관념처럼 나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었다.


유독 조용한 병실이었다. 바이탈 사인 체크 소리가 병실 공기 사이를 빼곡하게 채워 갔다. 병실의 가장 안쪽,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 겨울 햇빛보다 따뜻하게 웃고 있는 환자가 보였다. 온 얼굴로 웃어 보이며 반가움을 표현하는 해바라기 꽃 같았다. 이내 손 끝으로 피어난 수어를 보고서야 그분이 농인이라는 걸 알았다.


봉사자들이 인사를 건네며 도와드릴 게 있는지 묻자, 간병하던 분이 바쁘게 수어 통역을 해주셨다. 중간중간 우릴 향해 작은 화이트보드를 들어 보이시기도 했다. 간병인을 통해 의사소통을 했지만, 직접적으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필담으로 하셨다. 그렇게 조용하고도 바쁜 대화가 오갔다.


원하셨던 샴푸가 진행되자, 쨍하게 밝은 미소를 샴푸 하는 내내 유지하셨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농인 환자를 따라 웃음 짓고 있었다. 병실 가득 전염되듯 퍼져버린 행복한 기운은 그날 하루를 힘든 줄도 모르게 만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수어'라는 두 글자를 적어 놓았다. 다음 주에 만나면 온 얼굴로 미소 지으며 반갑게 인사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꽃님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무섭도록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모든 꽃님들을 뒤로한 채 바쁜 한 주를 보냈다. 환자들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어떤 일상은 모든 걸 망각한 채 지나간다. '수어'를 써 놓은 메모장을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다시 한 주가 흘렀다.


햇볕을 가득 머금은 해바라기꽃 같던 분이 이토록 아쉬움으로 남은 건, 두 번째 만남 때문이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호스피스 병동에 갔을 때, 생기를 잃고 힘없이 축 쳐진 해바라기 꽃이 거기 있었다. 병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볕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아래 누워 계시는 꽃님은 좀처럼 웃지 않았다. 필담도 힘들어하셨고, 봉사자의 손길을 정중히 거절하셨다.


돌아누운 모습을 보며, 진공의 상태를 상상했다. 일정하게 소리 내는 병실의 온갖 장비와 주변의 작은 소란들이 들리지 않을 터였다. 철저하게 외롭고 고통으로 고립된 혼자만의 세상에 계시는 듯했다.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한 채 그날의 봉사를 마무리했다.


봉사를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수어로 안부를 물었다면 돌아누운 등을 돌릴 수 있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을, 그 힘든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빛처럼 반짝이는 한 순간이라도 따뜻한 위로가 되고 싶었다.


그 이후 일주일 동안은 조금씩 수어를 익혔다. 아픈지, 불편한지, 시원한지... 봉사하며 표정으로 알아채는 것들을 수어로 연습해 보았다. 하지만...


연습했던 몇 가지 표현들은 아직도 내 손끝에 머물러 있다. 죽음은 그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일 년쯤 지난 지금까지도 수어를 사용할 기회는 없었다. 그날 이후로 수어를 연습하지도 않았다. 쨍한 여름의 한 중간에 선 어느 날, 문득 해바라기꽃 같던 꽃님이 생각났고 다시금 수어를 익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큰 숙제처럼 품고 있는 버킷리스트에 '수어'를 써넣었다. 부끄럽게도 여전히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있지만 언젠가는 손끝으로 마음을 전하게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꽃님의 손에서 피어났던 꽃이 나의 손에서도 피어나길. 그날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늦게나마 전해 본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차가운 바람 때문에 날씨가 매우 추워요. 그래도 햇살은 따뜻하네요.'

'어젯밤은 잘 주무셨나요?'

'발마사지 해드릴게요.'

'오늘도 평안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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