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묘 2시간전

어느 60대 노부부이야기

30대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보는 시선

우리나라 남성과 여성의 기대수명에 차이가 있기 때문일까.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호자 또는 간병인으로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은 환자의 자녀 그리고 아내이다. 상대적으로 남편이 아픈 아내를 간병하는 모습은 자주 보지 못했었다. 마음이 더 아프고 덜 아프고를 겨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병원을 나서서 일상으로 돌아가면서도 발을 붙잡는 잔상이 되는 건 자녀를 간병하는 부모의 모습이다.


여자 환자 네 분이 계시는 병실이었다. 병실을 들어서기 전부터 밖으로 새어 나오는 신음이 들렸다. 힘없는 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보호자와 눈이 마주쳤다. 한 손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작아진 척추 사이의 틈을 펼치며 인사해 주셨다. 온화한 미소를 형상화 한 얼굴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함께 했을 고된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도 따뜻하게 웃어 보이는 보호자의 모습에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60대 초반의 아내를 병간호하고 있던 60대 중반의 남편이었다.


집에 가고 싶다며 소리를 내는 환자는 초록물결에 잔잔하게 피어난 메밀꽃 같았다. 남편의 손을 잡은 채 '아아- 아- 아--'하고 소리 낼 뿐이었지만, 집에 가고 싶은지, 통증 조절이 안 돼서 진통제를 더 맞아야 할지 순식간에 파악해 버리는 보호자였다.  아내가 오늘 유독 힘들어한다며 발마사지를 청하셨고, 부기가 심한 발에 림프 순환 마사지를 시작했다. 잠시만 다리를 잡고 있어도 손자국이 움푹 들어갈 만큼 부기가 심했다. 발마사지 하는 내내 남편은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40년을 가까이 함께 살아오시면서 종종 부부싸움을 하긴 했지만, 뭉근하게 손 잡으며 건네는 말 한마디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곤 했다고 한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던데 애정과 존중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아들, 딸 두 남매를 결혼시키고 이제야 둘만의 여유를 갖으려는데 갑작스럽게 암진단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고생만 시킨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라는 말 끝엔 아무리 흘려도 마르지 않을 것 같던 눈물을 삼켜내는 게 보였다.


"이 사람이 젊어서 했던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날 밤 악몽을 꾸고 무서워하며 말했었죠. 누군가 찾아와서 같이 가자는 악몽이었다고요. 혼자 가기엔 너무 무서우니까 같이 가자고, 한 날 한시에 같이 죽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땐 로맨스였는데... 허허. 얼마 전에 아내에게 이야기했어요. 당신 무서우니까 내가 같이 가겠다고. 같이 손잡고 가 줄 테니 무서워하지 말라고.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우리 아이들이 아빠 걱정을 해요."


젊은 시절 두 분의 로맨스가 이렇게 무서운 현실이 되어 버렸다고 농담처럼 말하는 남편의 말에 함께 웃었다. 그리고 한동안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 코, 입에서 새어 나오려는 슬픔을 꾹 참으려는 듯.


종종 딸이 간병을 오면 1박 2일 자택에 가서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고 한다. 병실 보호자 침대에서 굳어진 몸을 잠시나마 푹 쉬고 올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을 기대하며 집에 간다. 하지만 요즘엔 그 시간이 두렵게 느껴진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집사람의 온기가 자꾸만 옅어져 가는 걸 느낀다고 한다.


메밀꽃님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꼭 잡은 손등을 다른 손으로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다 잃은 듯 허망해했다가도 애써 씩씩한 농담으로 이야기의 사이사이를 채우셨다.


내가 유일하게 선택하는 가족, '배우자'. 나에겐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관계 속 미지의 대상이다. 세상이 제시하는 그럴싸한 잣대로 평가한 배우자가 아닌 나의 마음으로 찾아내고 싶다. (부디 같은 시대에 태어났기를...) 삶의 여정을 함께 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손 꼭 잡고 마음 내려놓을 사람을 만나길 소망했다.


병원을 나서며 플레이리스트에 곡 하나를 추가했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이야기'를 반복 재생했다. 사계절에 맞춰 푸른 잎을 만들고 꽃을 피우다 이내 꽃송이를 떨어뜨리고야 마는 인생을 떠올렸다. 지난 푸르른 여름날 피워낸 당신이라는 꽃이 참 예뻤다고 기억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그리고 오래도록 함께 살아간다는 건 축복이다.

이전 15화 발끝에 피어 버린 푸른 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