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 봉사자가 보는 시선
팔 군데군데 퍼런 멍이 보이는 꽃님들을 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손을 바꿔가며 링거를 꽂기도 하지만 결국엔 발까지 라인을 잡기도 한다. 간혹 발마사지를 할 때 링거를 피해 마사지하기도 하는데, 링거로 인해 멍이 든 손, 발을 볼 때면 그동안 고생했을 시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는다.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수년까지 항암치료를 하며 몸과 마음이 지친 꽃님들이 체념하듯 호스피스 병동에 오는 걸 많이 봤다.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의 인식상, 호스피스에 죽으러 간다는 무서운 말씀도 하시곤 한다. ‘무서운 곳’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 과거 이십대였던 시절엔 나의 부모님도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만류하셨었다.
그래서인지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나는 꽃님들의 몸엔 그동안 병마와 싸워왔던 치열한 흔적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마음을 훑고 지나가며 힘들었던 지난날을 말해주는 것 같다. 어떤 꽃님들은 암을 처음 알게 된 날부터 어떻게 치료해 왔고, 어떠한 고비들을 넘기다 호스피스에 오게 되었는지 직접 이야기해 주는 경우도 있다.
그날도 거칠게 건조해진 손, 발 여기저기에 퍼런 멍이 든 꽃님을 만났다. 그다음 주엔 꽃님을 못 뵐 것 같은 마음에 더욱 기도하는 마음으로 발마사지를 했다. 전문 의료진은 아니지만, 10년이 넘는 세월을 호스피스 봉사자로 지내다 보면 풍월을 읊는 서당개가 되어 있다. 여전히 노련한 선배들에 비하면 배워나가야 할 마음이 많이 있지만, 임종의 순간이 가까워진 꽃님들에게서는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
그 꽃님의 발에서도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보았다. 종종 보던 단순한 멍이 아니었다. 끝내 피어버린 발끝에 푸른 꽃이 서글펐다. 꽃님의 맥박은 느렸지만 나의 심장은 순간적인 두려움에 두근거렸다. 청색증이라는 임종 전 증상을 본 적은 많지 않았기에, 한 번씩 마주하게 되면 심장이 덜컹하게 된다.
가는 데에는 순서가 없다는 말을 되뇌며,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나의 심장이 먼저 멈춰 버릴지도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고 늘 생각한다. 1초 1초 순간을 살아가며 건강하다는 착각에 자만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푸른 꽃이 피어버린 환자의 발을 보면 덜컥 겁이 나고야 만다.
마사지 크림을 바르고 꽃님의 발을 어루만진다. 농축된 삶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마지막 여정에 동참하는 것 같아 귀하고 소중했다가도 한없이 작아지고 가여워진다. 사전을 통해 배운 언어 학습도 있지만 상황에서 받아들이고 익히는 언어도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말을 그렇게 알았다. 아직도 또렷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그동안 사전적 정의를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 단어를 어느 순간 ‘받아들였다.’
그 꽃님의 삶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 발끝에 피어버린 푸른 꽃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이 꽃이 결국 떨구어지는 순간이 올 때까지 누구보다도 찬란하게 삶을 살아내길, 그 거친 호흡 곁에 함께 하는 가족들에게 마음을 내려놓고 평안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