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 떡국

2409

by 모래알


한해의 2/3인 8개월이 훌쩍 지나버렸고 어느덧 추석이 다가온다. 절기는 이미 가을의 입구라는 처서를 지났는데도 낮최고기온은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의 연속이다. 9월 중순에도 여전히 에어컨을 돌려야 그나마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날씨이다. 추석연휴를 앞두고 있는 금요일 저녁에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완도산 활전복이었다. 주문한 적이 없는데 웬 전복이지 했더니 그제야 남편이 막내시누이가 추석선물을 보낸다는 연락이 왔다고 전한다. 전복을 좋아라 하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나인데 웬일로 이런 걸 보냈지 하며 설레는 맘으로 손질을 시작했다.


별 준비 없이 덤벼든 전복 손질은 무려 1시간 이상 걸렸다. 처음에 한두 개 손질할 때까지만 해도 뭘 만들어 먹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뿐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고 짜증이 났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이즈는 콩알만 하고 개수는 무려 30여 개가 되는 걸 보냈는지. 그냥 손바닥만 한 큰 거 대여섯 개면 딱 좋을 텐데. 이쯤 되니 살짝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 골탕 먹이려고 보낸 거 아닐까, 신종 괴롭힘인가 라는 의혹. 하나하나를 솔로 닦아야 하고 껍데기를 힘줘서 근근이 떼어내고 나면 다시 이빨과 모래주머니를 잘라내서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과 내장을 분리한다. 익숙하지 않은 작업을 서서 하느라 힘든 데다가 개수가 너무 많아서 나중에는 다리와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원래는 손질을 다 하고 저녁으로 전복라면을 끓여 먹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신경질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도와달라고 남편을 몇 번을 불러도 이 양반이 도대체 나오지를 않는다. 이미 저녁 먹을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났다. 겨우 다 정리하고 방에 들어가 보니 남편은 초저녁부터 꿀잠을 달게 자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저녁은 전복라면이니 알아서 끓여 먹으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부엌으로 나왔다. 시누이에 대한 짜증과 남편의 꼴 보기 싫은 모습까지 아주 제대로 명절전야제이다. 잔뜩 씻어놓은 전복을 보면서 몸에 좋고 맛있는 건 내가 다 먹어치워 버려야겠다는 삐뚤어진 의욕이 생겼다. 어차피 남편은 해산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제주도 신혼여행에서도 해녀들이 따준 전복회는 내가 다 먹었었다. 남편은 내 옆에 앉아서 삶은 달걀을 먹었다. 그래 열심히 일한 나나 맛있게 먹자.


너무 허기가 져서 급하게 혼자 먹을 저녁메뉴는 전복 떡국으로 정했다. 마침 전날 먹고 남은 떡국이 잔뜩 있었서였다. 서너 마리를 큼직큼직하게 썰고 내장까지 푸짐하게 넣어서 참기름으로 달달 볶은 후에 불은 떡국을 넣고 잠깐 끓였더니 금세 초록색 국물로 바뀌었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대며 한 숟갈 떠서 먹는 순간 좀 전까지 나를 화나게 했던 나쁜 생각이 사르르 사라진다. 개수가 많아서 힘들었는데 도리어 많은 양을 보니 어느새 부자가 된 기분이다. 큼직한 전복 한 덩이를 먹으니 이런 호사가 있나 싶다. 내장까지도 너무 신선하니 맛있었다. 아- 행복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전복 떡국 한 그릇으로 모든 스트레스가 풀린 나는 얼른 솥에 눌러져 있던 누룽지로 전복죽을 끓이고, 또 일부는 말린 표고버섯과 함께 전복장을 만들었다. 제법 훌륭한 메뉴들이 완성되었다. 다음날은 전복 라면을 가족모두 맛있게 먹었다.


재료를 손질하는 과정은 힘들고 고되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맛있게 요리한 음식을 먹으면 힘겹던 시간은 다 용서가 되고 그 순간만큼은 다른 무엇도 부럽지 않다. 단순한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먹는 걸 너무 좋아해서일까. 행복하기가 이렇게 쉬운 일이다. 하루에 세끼를 먹으니까 최소 3번은 행복감을 느낄 수가 있다. 요즘 우리들이 맛집을 찾아 헤매는 깊은 저변에도 가장 손쉽게 만날 수 있는 기쁨에 대한 욕구가 깔려있는 것이다. 가족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나 자신에게 한 끼를 대접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먼저 행복해야 가족을 행복하게 해 줄 힘이 생긴다. 나를 소중하게 돌보고 사랑하고 스스로 힘을 비축한 후에야 진정으로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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