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짝사랑은 초등학교 5학년, 박도선이다. 공부를 썩 잘해서 반장이었고 키는 키가 크지 않은 남자선생님만큼 컸다. 공부야 나도 하기만 하면 잘할 수 있으니까 별로 끌리지 않았지만 또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만 보면 두근거렸다. 사실, 보이지 않을 때도.
도선이는 말수가 적었다. 골목에서 사내애들끼리 섞여 놀면서 시끌벅적할 때 도선이의 목소리는 찾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다. 어느날, 남자애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 이름을 털어놓기로 했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들이 넉넉한 동네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기대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따위 '놀이'를 한 녀석들이 괘씸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을텐데… 창피해서 어떻게 나다닐지 아찔했다. 어쨌든 놀이의 내막은 바로 다음 날 여자애들 사이에 좍 퍼졌다.
'전경자'도 나왔다, 그것도 도선이한테서. 당연히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고마웠다. 내 평생 누구한테 진심으로 고마웠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도 도선이와 나는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실은 그 이후에도 없었다.
동네 어귀로 들어서면서 왼편으로 뚫린 첫 번째 골목, 그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오른쪽으로 첫 번째 한옥이 도선이네 집이었다. 첫 번째 집이다 보니 담 한 쪽은 길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다. 벽돌 담이었다.
만화가게 아저씨는 (도선이네 집하고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벽돌 담에 나무선반을 대여섯 개 설치하고 그 위에 (소설집도 더러 있었지만 주로) 만화책을 가지런하고 빽빽하게 꽂아 놓았다.
담벼락을 마주하고 좁고 기다란 나무 벤치에 앉아 <엄마 찾아 삼 만리>에 얼굴을 박고 마음을 쏟아내고… 교실에서는 펼쳐 세워 놓은 교과서 안에 끼워 넣고… 밤에는 이불 속에서 손전등으로 비춰가며 …
아이가 길바닥에서 만화 보는 것을 꺼려하는 엄마들은 '만화 대여'를 선호했기 때문에 만화가게 벤치는 늘 한가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관심이 많지 않은 참 좋은 엄마였다. 도선이 엄마도 우리 엄마 같았나? 만화가게 벤치에는 나하고 도선이, 우리 둘만 앉아 몇 시간씩 보냈다, 허구한 날, 말 없이.
1959년, 도선이는 우리나라 최초 남녀공학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로, 나는 이화여자중고등학교로.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후, 1979년에 귀국한 내가 나름 자리를 잡고 나서 착수(?)한 일은 도선이의 행방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어렵지 않았다, 나와 세 살 터울인 친언니의 친구가 부고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덕에. 박도선이는 미국으로 이민가서 워싱턴 DC 근교에서 살고 있단다. (40년이 지난 오늘도 그럴까?)
도선이 이후에도 나는 짝사랑이라는 사랑을 여러 번 했다. 그러다 한 번은 이런 소리도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당신을 스쳐
보라, 이 참담한 형상을